웬만한 건 그냥 규칙을 따르고 보는 재미없는 사람인데도 언어에 대해서만큼은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많았다. 크면서 이런저런 공부를 하며 어떤 궁금증은 스스로 어느 날 깨닫기도 하고, 또 어떤 의문들은 배워서 알게 되기도 했다. 모국어를 풍성하게 누리다가 한 번씩, 자연히 쓰는 이 말들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우리는 왜 이런 방식으로 말하고 글을 쓰는지, 숱한 궁금증이 스쳐 결국 그런 생각 꾸러미를 매주 한 편씩 올리기까지 하는 나. 문법에 대한, 나의 첫 호기심은 무엇이었을까. 문득 얼마 전, 거기에 생각이 미쳤다.
초등학생 때였는지, 중학생 때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TV에 경상도 방언을 쓰는 사람들이 나오는 걸 볼 때였다. 가만 생각해 보니 경상도에서는 무언가를 물을 때, 문장의 끝 어미를 ‘-가’ 혹은 ‘-고’로 끝맺는 경우가 많았다. 분명 어떤 규칙이 있을 텐데 그게 무얼지, 물론 우리가 평소 언어를 구사할 때 규칙을 인지하고 말하지는 않지만, 종결 어미의 선택을 가르는 기준이 궁금했다. 당시 나의 챗지피티는 우리 엄마. 엄마에게 바로 달려가 질문을 해댔다.
엄마, 경상도 말로 어디 가는 길이냐를 어떻게 말해?
응? 어데 가는 길이고? 어디 가는데?
오. 경상도 말로 의문문 몇 개 더 들려주라.
엄마는 웃으며 몇 가지를 들려줬다. 그렇게 의문문들을 듣다가, 다시 질문했던 것 같다. 학교 가는 길이냐,를 어떻게 묻냐고.
학교 가는 길이가? 학교 가나?
그때 나는 막연히 알아챈 듯하다. 의문사가 들어간 의문문은 ‘-고’로 주로 끝나고, 그렇지 않은 의문문은 ‘-가’로 주로 끝난다는 것을. 그쯤 생각하고는 이내 다른 딴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겠지.
이후 학부 수업을 들으며 중세 국어의 흔적이 경상도 방언에 꽤나 많이 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문문 또한 마찬가지. 어릴 땐 문법 개념어를 알지 못해 투박하게 나름의 결론을 내렸던 것을 이제는 제법 세련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어 반가웠다. 긍정과 부정 둘 중 하나의 답을 요하는 판정 의문문은 주로 ‘아’ 계열의 종결 어미가, 설명을 요하는 의문문인 설명 의문문에는 주로 ‘오’ 계열의 종결 어미가 사용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중세 국어의 문법 체계가 그대로 전해 내려온 것이라는 걸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등록금을 아까워하며 공부한 적은 없었지만, 그날 처음 등록금 낸 보람이란 걸 느꼈던 것 같다. 대단치도 않은 호기심이었지만, 그에 대한 답을 근사하게 확인할 수 있어서.
언어의 역사를 짚어볼 실마리가 되어 가치 있기도 하지만, 방언에는 지역마다의 특색이 있고 또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의 결이 느껴져 더욱 흥미롭다. 공식적인 상황에서는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통일된 표준어를 사용하는 것이 소통에 들이는 에너지를 줄여 경제적이겠지만, 방언은 방언대로 오래도록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서인지, 없는 방언을 창조하다시피 하는 소위 ‘미디어 사투리’라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한다.
의문문이 그러하듯 방언에도 체계가 있건만, 무턱대고 쓰는 ‘황당하노’ 같은 말을 볼 때면 불편한 감정이 일시에 끼친다. 그런 걸 볼 때면 번역가로 일하는 친구 생각이 난다. 일본의 만화나 소설 같은 경우 작중 인물이 오사카 출신이면 주로 경상도 방언을 구사하는 것으로 번역하는데, 친구는 경상도 방언에는 완전히 문외한이라 늘 애를 먹는다고 한다. 무지성으로 문장의 끝만 흉내 내듯 쓰고 싶지 않다며 늘 영상도 찾아보고, 주변 경상도 지인에게 아주 꼼꼼하게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한 지역의 방언이라 해도 그들의 일상어. 그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게 얼마나 멋져 보이던지. 꽤 예전에 방영했던 한 일본 드라마에서 — 아마도 강원도 방언을 흉내내어 쓴 듯한 — 정체를 알 수 없는 사투리가 난무하는 걸 황당히 봤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처음 친구의 그런 고민을 들었을 땐, 아, 그때 그 드라마도 내 친구처럼 깊이 고민하며 작업하는 사람이 번역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마저 들었다.
우리는 고유하고도 특유한 각자의 언어로 서로 대화를 나눈다. 꽤나 독자적이며 개별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들이 그 안에서 또 서로가 사용하는 고유한 말들에 관심을 가지는 건, 그러니 참 친밀하고 따뜻한 일일 것이다.
몇 해 전 겨울 문턱에 여름 더위 그리워 읽은 책, 『불볕더위에 대처하는 법』1)의 한 구절을 옮기며 글을 마무리지을까 한다. 작가가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표현한 첫 작품이라 하는데, 정체성 하면 우리도 빠지지 않으니까. 그리고, 이 산만하고 부족한 글을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할지 너무 어려워서. 킥.
"엄마." 에이바가 다시 말한다. "저예요."
"에이바?"
그 순간 에이바의 머릿속에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발음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이 사람뿐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나와야 하는 소리 그대로의 소리가 나오는 입을 가진 유일한 사람. 그 모든 세월에도 여전히 틀림없는 골웨이 사람의 발음.
목요일 오후 세 시가 스스로 약속한 마감 시간인데 지키지 못했다. 개인적인 어떤 사정과, 또 개인적인 어떤 사정으로. 둘 중 하나는 콧물 이슈가... 문제였는데. 다음 주는 그러니 사이시옷 이야기를 해볼까.
1) 매기 오파렐, 이상아 옮김,『불볕더위에 대처하는 법』, 문학과지성사, 2020, p.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