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 좋은 건 뭘까. 나로서는 자신과 꽤 친해졌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여전히 흔들리고, 쉽게 고단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랑 사이좋게 지내게 되면서 불안정을 빨리 알아챌 수 있다든지, 혹은 더 나아가 불안정할 때 안정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비교적 쉽게 처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어릴 때보다 덜 상하고 덜 아플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하다. 나와 내가 대체로, 합의를 잘 이루고 있으니까. 이렇게 쓰고 보니 시간이 내게 퍽 다정한 편이었구나, 새삼 느낀다.
자신과 친밀한 나는 아프고 힘들 때 덜 아프고 덜 상하고 싶어서 서점의 구석진 책장 사이나 어두운 영화관으로 숨어들곤 한다. 팬데믹을 지나며 자주 못 가게 됐지만, 예전엔 혼자서 한 달에 영화를 두 편 이상은 볼 정도로 영화관을 좋아했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도 아닌데 오래 두고 생각한 영화 중 <본 투 비 블루(Born to be Blue)>가 있다. 에단 호크가 쳇 베이커(Chet Baker)로 분해 쳇이 아낌없이 미모와 재능을 낭비하고 짓뭉개는 시기를 담아 낸, 자신과의 관계를 헤아리는 지금 당연한 듯 떠오르는 영화.
나로서는 그런 삶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제법 선명한 사실은, 쳇은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멍하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 문장만이 남았다.
망가진 게 아냐, 망친 거지.
벌써 십 년 가까이 흘렀는데도 그때의 이 한 줄짜리 감상이 종종 떠오른다. 망가지는 것과 망치는 것의 차이에 대해 되새기며, 이 두 단어에서 책임의 회피와 전가(轉嫁)를 느낀다.
망가지다는 언뜻 보면 피동사 같다. ‘-아(어)지다’로 형태소 분석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데다 ‘못 쓰게 되다, 좋지 않게 되다’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어원을 정확히 알 수가 없는, 문법적으로 피동사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자동사이다.
망치다 역시 그 의미로는 사동사의 인상을 준다. 망하게 하고, 못 쓰게 한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동 접미사가 결합한 형태도 아니고, 문장에 놓일 때엔 그저 목적어를 요구하는 타동사일 뿐이다.
그럼에도, 피동사가 아닌 ‘망가지다’와 사동사가 아닌 ‘망치다’를 나는 온전히 피동의 의미와 사동의 의미로 썼다. 왜 쳇 베이커 인생의 극히 일부, 영화적으로 각색된 이야기를 보고 내내 망가짐과 망침을 생각하며, 이 두 단어를 각각 피동사와 사동사로 쓴 것일까. 피동사도 사동사도 아니지만 뻔뻔하게도 그렇게 썼습니다, 하고 우기는 글, 그게 바로 오늘 치의 주절거림이다.
쳇은 망가졌다.
이 문장을 바라보면 동작주를 숨김으로써 원인이 무엇이든 그는 산뜻하게 책임을 회피할 수 있어 보인다. — 많은 피동문이 그런 의도로 언어 생활에서 활용된다. — 나아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원인이 무어가 중요해, 저 잘난 사람 이미 망가졌는데.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나는 쳇이 망가진 걸로는 볼 수 없었다.
쳇은 그 자신을 망쳤다.
'망치다'는 사동사가 아니기에 이 문장은 그저 능동문이다. 쳇이 자신을 그냥 망친 것. 하지만 앞서 우겼듯, 나는 이를 사동문으로 썼다. 자신이 자신을 망치도록 방치했다고 생각했으니까. 적어도 영화 속 그 남자, 내가 바라본 쳇 베이커는 멈출 수 있었음에도, 덜 망가지고 덜 아프고, 어쩌면 회복까지도 꿈꿀 수 있었음에도 그 기회를 발끝으로 밀었다. 스스로 그런 방만함에 이르는 내내 그는 자신을 멈추지 않았다. 쳇은 충분히 사동주로서, 피사동주인 그 자신을 망친 것이다. 이것이 사동문이 아닐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은희경의 『새의 선물』 속 진희가 저편에서 등장한다. 어른들 눈으로 편하게 설명하자면 ‘조숙한’ 열두 살 진희. 진희는 어린 날에 이미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로 자신을 분리하여 스스로를 단속한다. 그 단속은 어쩌면 돌봄이다. 자신보다 철없는 이모를 바라보며, 자신과 이모를 향한 할머니의 사랑을 섬세하게 셈하듯 감각하면서 서늘하게 자라난 진희. 사동주인 진희는 피사동주인 자신을 내던지지 않는다. 제 앞에 놓인 모든 감정과 감각들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똑바로 바라보고 관찰하고 분석한다. 그 애를 생각하면 어디까지가 자신을 지키는 것이고 어디서부터가 자신을 망치는 것인지, 이런 문제가 선명할 수 없음에 또 주춤, 쉽게 입을 떼기가 또 어려워진다.
진희와 함께 <본 투 비 블루>를 봤다면, 진희는 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 일단 진희는 나랑 같이 영화 보는 걸 거절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나는 진희랑 영화를 보자고 말할 용기를 못 냈을 것이다. 어쩌면 진희는 일단 영화를 보고 쳇에 대해서는 아주 잠시만 생각하다가, 쳇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곰곰 점검하다 자조할 틈을 놓치지 않을 지도.
한때의 나는 괜시리 진희를 따라 ‘보여지는 나’의 처신에 대해 더 엄격했다.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엄준했고 그런 주제에 일관되지 않았다. ‘보여지는 나’는 그를 따라 휘청였으니 뭘 잘못해도 핑계를 찾았고 마땅찮은 핑계는 ‘바라보는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둘 다 멍청이였구나. 갑자기 웃음이 좀 터지는데, 그래도 이미 말한 바, 나는 이제 스스로와 제법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 마음에 쏙 들지는 않더라도, 너 망가지지 않기야. 나는 망치지 않을게,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