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감다가 툭 튀어나온 정수리가 느껴진다. 가르마를 타고 이어지는 내 정수리는 완만한 선을 그리다가 그 끝이 살짝 솟은 모양새인데, 그냥 뾰족한 것도 아닌 것이 약간 계단(…) 같다. 순간, 친구와 나눴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알고 지낸 지 스무 해도 더 넘긴 친구와 키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나의 정수리 모양에 대해 설명했는데, 아, 이거 다음에 만나면 뭐 한번 만져 보라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자 웃음이 좀 터졌다.
벗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거의가 키가 큰 편이다. 나는 작다. 내 또래 여성의 평균 신장은 되지만 본래의 키보다 주변에서는 더 작게 느끼는 모양이다. 키를 누군가 물어서 대답하면 생각보다 크네? 하니까. 작아 보이는 이유에 대해 나름으로 생각했을 때, 처음엔 비율 문제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몇 해 전이었나, 물끄러미 거울을 보다가 정수리가 유독,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채기 어렵지만, 그 모양새가 마치 덤처럼 한 삽 더 퍼다 올려놓은 것마냥 좀 더 솟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딘지 징그럽기도 했지만, 일단은 꽤 웃겨서 좀 웃었더랬지.
그러니까 이거였어. 자세히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정수리의 생김이 나의 키를 조금 더해 준 것이다. 신장을 잴 때 금단의 깔창 같은 걸 딛고 섰던 것과 마찬가지랄까. 아니지, 그래도 이건, 내 몸인데. 내 몸이고 내 정수리인데! 하지만 숫자를 더하는 데에만 소용이 있는, 커 보이는 데에는 약간의 보탬도 안 되는 듯한 이 녀석을 키에 포함하는 것이 의미가 있나. 이제부터 양심껏 병원에서 잰 키에서 2센티미터쯤, 뺀 것을 공식 키로 소개해야 할까?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다 무슨 소용이며 무슨 의미일까. 의미 없음. 무의미다.
내가 하는 대부분의 생각이나 고민엔 사실 대단한 의미가 있지 않다. 그런데 가끔은, 어디까지가 그럼 의미 있는 이야기라 할 수 있나, 싶어질 때가 있다. 마치 덤으로 주어진 것만 같은 약 2센티미터는 그럼 의미가 있는, 내 키의 일부로 받아들여도 되는가의 문제 같은, 아주 사사롭고 그래서 우스운 생각들. 그렇게 의미와 무의미를 저울질하다 보니, 어느 사이 무의미로 점차 시선이 닿고, 나의 이 헛생각은 느릿느릿, 성기게 접사에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무의미는 《표준국어대사전》에 파생어로 등재되어 있다. 한자 ‘무(無)-’를 어근인 ‘의미’ 앞에 오는 접두사로 처리한 것이다. 한자어 접두사는 그 문법적 지위를 설정하기에 조금 까다로운 구석이 있다. 접사는 문법적 기능이 강한 형식 형태소로 분류되는데 한자어는 애초에 의미를 지닌 표의 문자이기 때문이다. ‘무의미’의 ‘무-’는 그래도 사전적으로나 대부분의 학자들이 접사라고 인정하지만, ‘대가족’의 ‘대(大)-’나 ‘반비례’의 ‘반(反)-’의 경우 관형사의 성격이 더 크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접두사를 어근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문법적인 의미를 많이 가지는 요소로 설명하지만, 그 ‘상대적’이라는 말 자체가 너무도 분명치 않은, 모호함을 지닌다. 애매한 내 키 2센티미터처럼, 썩 깔끔치 않은 모호함을 마주하고 보니 우뚝, 또 멈춰서게 된다.
의미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접사라는 것의 문법적 성격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그것이 지니는 ‘의미’에 초점을 두면 논의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와 관련된 연구는 보통 접사가 실현해 내는 문법적 기능에 집중된다. 어종을 가리지 않고 결합하여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생산성을 지녔다는 것, 비자립 형태로서 2음절 이상의 자립적 어기를 앞에서 수식하는 형태로 결합한다든지 하는. 이러한 근거들이 여러 한자어 접두사를 접사로 규정하는 의견에 덧붙는다. 이런 정리 방식은 편리하기도 하고 합리적이기도 하다. 어떠한 형태소를 접사라 하기 조금 애매하다면, 접사로서의 기능을 좀 더 찾아 주는, 뭐 그런 거.
정수리를 매만지다 접사까지 생각하며 의미에 지독하게 매달리는 사이 하루가 다 간다. 이런 생각들을 하는 데 쓰는 시간들은 내 생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할까. 그보다, 특이한 모양의 정수리가 더해 준 내 2센티미터는 당당하게 나의 키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일까. 사전적 정의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분명 내 정당한 신장(身長)의 일부, 내 키가 분명한데 말이다.
의미와 무의미를 생각하자니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2014)가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쿤데라의 책에 실린 작가 소개는 그가 죽기 전까지는 단 두 문장이었다. 너무나 담백하여 타닥타닥 말을 찍고 중얼대다 절로 잠시 멈추게 하는, 시작과 지금에 관한 문장.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1975년 프랑스에 정착하였다.
의구심과 수용 사이 어떤 의미가 자리 잡든 그것은 내 의미이고, 그 또한 어디까지가 의미로 남을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요 며칠의 생각은 또 이렇게 글로 남았네. 끝내 남을 문장은 한두 문장뿐이더라도.
참고문헌
고영근·구본관,『우리말 문법론』, 집문당
윤이운, 「한자어 접두사의 사전적 처리 연구」, 한국사전학 제45호
현영희, 「한자어 부정 접두사의 결합 양상」, 한국사전학 제2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