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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서른 날. 앞으로의 꼬박 한 달을, 수민은 인계 기간으로 잡았다. 처음 학원 일을 시작할 때, 원장은 이제는 수민에게 너무도 익숙한, 예의 그 과장되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당일 그만두고 나가도 된다고까지 했었지만, 한낱 눈물겨운 허세일 뿐인 그 말을 핑계 삼아 책임을 내던질 만큼의 뻔뻔함이 수민에게는 없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쌓은 무언가, 그것이 노력이든 애정이든 단지 건조한 의미의 경력이든, 그러한 것들을 그렇게 간단히 뭉개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갑작스런 엄마의 건강 문제가 아니었다면,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을 떠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이런 일은 예고 없이 닥치는 것이었고 생각할 시간이란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민에게 큰일이라면 큰일이었으니, 엄마 걱정과 환경의 변화에 대한 심란함이 뒤섞여 며칠은 마음이 엉망이었다. 어찌 되었든, 선택들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이런 순간마다 잔뜩 굽어 있는 수민의 등을 은근한 힘으로 떠미는 건 엄마의 몇 마디 말들이었다. 네가 와서 지냈으면 좋겠다. 학원에는 슬슬 이야기를 해두는 게 좋지 않겠니. 집은 세를 내놨으니 보러 오는 사람들 있음 친절히 보여 줘.와 같은. 그렇구나, 결국 수민이 해야 하는 것은 선택이라기보다 받아들이는 마음을 먹는 쪽에 가까운 것이었다. 마음을 먹으면 돼. 크게 숨을 들이켜 삼키는 시늉을 하고 출근을 한 오늘, 천진하게 코를 파고 웃고 떠드는 7세 아이들을 앞에 앉혀 놓고 가르쳤던 속담, “쇠뿔도 단김에 뺀다”가 엉뚱하게도 한 글자 한 글자, 그야말로 백석의 표현대로 주먹질하며 달려드는 걸 간신히 외면하며 그는 제법 단호하고 차분하게 퇴직 의사를 알린 것이다.
그럼 슬슬 이사 준비해야겠네.
응. 근데 뭐 준비랄 게 있나.
얘 봐라. 엄마 집에 네 짐 다 못 들어와. 버릴 수 있는 거 죄 버리고 와.
내가 짐이 어딨다고.
엄마 분명히 말했어. 버릴 수 있는 거 다 버리는 거야. 엉뚱한 거 끌고 들어오지 마. 엄마 환자야. 스트레스 받을 일 만들지 말란 소리야.
알겠어. 별걱정을….
생각보다 정리 오래 걸릴 거야. 일 인수인계가 중요한 게 아니고 너는 짐 정리가 지금 제일 중요한 거니까 그저 지금부터 당장 매일매일 착착, 다 정리하고 다 버려. 알겠지?
알겠어. 매일매일 착착, 매일매일 착착.
마치 구호 외치듯 엄마의 말을 따라 하는 수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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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삿짐 정리를 위한 계획을 세웠다. 가벼운 것부터 점차 무거운 것으로. 쉽게 버릴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수민은 침실 정리부터 하기로 결정했다. 잡동사니를 넣기만 하지 꺼내는 법이 없던 서랍장부터 시작해서 옷장, 책장도 정리해야지. 침실을 둘러보다 옆에 미닫이문으로 연결되어 있는 조그마한 곁방에까지 시선이 닿았을 때, 그는 조용히 탄식했다. 아, 엄마 말이 맞았네. 생각보다 오래 걸리겠다. 하나하나 눈길 닿기 시작하니 숨이 차올랐다. 빠듯이 숨이 찬 폐에서 공기를 빼내듯 숨을 내쉬며 다시 되뇌었다. 가벼운 것에서부터 무거운 것으로, 현관에서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매일매일 착착.
미닫이문을 천천히 열고, 천장에 전동식 빨래 건조대가 설치돼 있는 소위 알파룸이라 불리는 곁방으로 들어섰다. 이 집에 이사 오면서 수민은 이 방을 작업실로 쓰고 싶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이 꼴이라니. 이전 집에서 쓰던 행거에 입지 않는 겨울옷들이 줄줄이 걸려 있고 창 가까이에는 쓰지 않는 백팩들이 쌓여 있었다. 백팩은 하나만 남기고 버려도 되겠지. 안을 비우고 헌 옷 수거함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처음 손이 닿은 보라색 백팩을 열었을 때, 아…. 시작부터 너무 난관. 커다란 우편 봉투 안에 엄마의 사진들이 몇 뭉치나 두서없이 들어 있었다. 헤아려 보니 이 집에 산 지가 여섯 해.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기억 못 할 정도의 세월도 아닌데 대체 언제 가방 안에 이런 사진들을 넣어 놨는지 기억이 조금도 나지 않았다. 그대로 주저앉아 다른 가방들도 열어 보니 세 식구가 썼던 예전 핸드폰들과 캠코더, 디지털카메라, 온갖 작은 전자기기들이 가방마다 작은 상자, 파우치에 담긴 채 들어 있었다. 다 같이 살던 집을 팔고 서울에 수민이 살 오피스텔 한 채, 그리고 지금 엄마가 살고 있는 지방의 집 한 채를 마련하면서 처음으로 독립을 한다는 생각에 그는 부모의 이혼이 그다지 슬프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 망연히 앉아 생각한다. 독립을 한 건 내가 아니었구나. 엄마였구나….
백팩들에 든 건 모두 버리기 어려운 것들뿐이었다. 이전 집에서 버리지 못해 그대로 가방에 쑤셔 넣은 채 이 방 가장 구석에 쌓아뒀을 것이다. 그대로 앉아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들을 봤다. 하나같이 싱그럽고 아름다운 엄마. 젊은 날의 권정연. 큰 키에 너무 마른 체형, 가만 서 있어도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젊은 여자는 천연 곱슬이 풍성해서 마치 구름 같은 머리를 이고 백 일쯤 되어 보이는 수민을 안고 있다. 엄마의 엄마 집 앞에서 찍은 그 사진을 수민은 참 좋아했다. 다 앨범에 있었을 텐데 왜 종이봉투에 이렇게 정신없이 뭉쳐져 들어 있는 것인지. 사진이 구겨지지 않게 잘 포개 우선 있던 그대로 가방에 넣고는 어찌해야 할지 손도 쓰지 못한 채 그 작고 무거운 방을 조용히 나왔다. 저건 내 짐이 아니야. 내가 정리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겠다. 수민은 조용히 옷장 문을 열고 안 입은 지 3년 넘은 옷은 버리자. 라고 아침에 나름으로 정해 둔 원칙을 소리 내어 말하고 옷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꺼내 커다란 비닐 가방 안으로 신속하게 넣었다. 이건 참 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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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쉽지 않았다. 수민은 지난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옷마다 추억이 생각나고 이 옷을 지금은 못 입어도 내년에는 입을 수 있지 않을지 가능성을 점치다, 고등학교 교복에 도달하자 모든 집중이 사라져, 졸업 앨범을 찾아보고 절대 열어 보지 않기로, 저건 통째로 그냥 가져가야 한다, 굳게 다짐한 편지 상자에까지 손을 댄 것이다. 오늘은 다 망했다는 절망에 먼지가 가득한 몸을 그냥 침대 위에 내던졌을 때가 아침 여섯 시, 소스라치게 경기하듯 일어났을 때가 아홉 시였다. 알람을 맞춰 둔 시간은 열 시였지만, 어쨌든 일어났으니 다행이다, 마음을 쓸어내리며 샤워를 하고 출근길에 생활용품 매장에 들러 사진첩을 사기로 했다. 학원 출근은 매일 열두 시. 수업이 오후 세 시 시작인데 왜 열두 시까지 가야 하는 것인지 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곧 있으면 그만둘 곳. 더 불평할 필요는 없었다.
샘, 이야기 들었어. 그만둔다며?
학원을 그만둔다는 소식이 원장과의 대화 이후 빠르게 동료 선생들에게 전달된 모양이었다. 남 말 하기 좋아하는 고 선생이 학원에 들어선 수민을 보자마자 과장된 몸짓으로 달려들어서는 그의 손을 잡고 속삭이듯 물었다.
아, 네 그렇게 됐어요. 갑작스레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거야 있나. 샘, 결혼해?
네? 아뇨. 엄마 몸이 좀 안 좋으셔서 얼마 전에 검사를 받으셨는데 아무래도 제가 좀 챙겨드려야 할 상황이라서요.
아, 그래? 난 샘 결혼하는 줄 알았어. 연애 안 한다 해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아유 선생님, 이 나이에 무슨 결혼은요. 예전 같으면 선 봐도 재취 자리나 들어올 나이인데….
어머 샘, 진짜 웃기다니까.
손뼉까지 치며 크게 웃곤 자기 교실로 향하는 고 선생을 보면서 수민은 앞서 보인 웃음을 거두고 얕게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는 괜찮으신 거냐고 물을 법도 한데 이 사람은 자신이 보는 것만 보고 듣는 것만 듣는 사람이지. 이런 사람에게는 그냥 웃는 말이나 하는 것이 편해, 생각하다가 문득 간밤 자신을 잠 못 자게 만든 편지 상자 속, 고1 때 받은 롤링 페이퍼 메시지들 중 한 줄을 떠올렸다. 1학년 3반 15번 서수민에게 친구들은 주로 호의적인 인사를 남겼지만, 그 사이 유독 눈에 띄던 한 줄.
[너 너무 열심히 해서, 좀 부담스러웠지만…. 뭐 방학 잘 보내고.]
고지식한 15번 서수민이 짜증 났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박지은아, 나는 이제 그런 사람이 아니란다. 지금의 난 능글맞게 재취 자리 어쩌고 하는 농담도 서슴지 않으며 스스로를 아무렇지 않게 깎아내릴 줄 아는 서른을 훌쩍 넘긴 사람이란다. 기대하던 거 계획하던 거 무엇에도 제대로 도달하지 못했다는 걸 매일 확인하는 어른이란다. 뭐 너도 잘 지내렴.
그는 소식도 모르는 박지은에게 속엣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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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만에 짐 정리에 질려버렸던 수민은 버릴 수 있는 것부터 버리자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정리가 아니라 비우는 거야, 버려 버리는 거야. 퇴근하자마자 일단 그냥 쌓아 둔, 망설임 끝에 버리기로 결심한 옷들부터 들고 헌 옷 수거함에 욱여넣고 돌아온 그는 주방에 있는 조리도구들 사진을 하나하나 찍었다. 엄마에게 보여주고, 버리면 안 되는 것만 고르라 할 생각이었다.
문자 봤어. 사진들 다 뭐니?
프라이팬이며 냄비들이며 다 우리 쓰던 거 내가 가지고 왔잖아. 그냥 버려도 되는지 모르겠어서.
다 버려, 다. 엄마한테 사진 보내지 말고. 물어볼 거 없어, 그냥 다 버려.
그냥 내 마음대로 다 버리라고?
그래…. 뭘 하나하나 물어봐서 어떻게 버리려고 해. 엄마 그 짐들 안 보고 싶어.
알겠어. 엄마 근데 엄마 사진들 말이야.
사진?
응, 엄마 사진들이 그냥 다 봉투에 들어 있더라고.
아….
사진들은 앨범 사다가 정리해서 가져가려는데 그렇게 할까?
옛날 사진 봐서 뭐해. 그냥 버려도 된다.
수민이 아는 한, 엄마도 무얼 잘 버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버리면 사야 하니까, 아끼고 싶은 마음에 버리지 못하기도 했을 것이고, 기억이랄지, 추억에 대한 애착도 많은 편이어서 자잘한 것들을 잘 버리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혼도 그렇게 오래 걸렸을 것이다. 그런 엄마가 이제는 다 버리라 한다. 알아서 잘 정리해서 오라는 말만 반복한다. 짐 버리는 일 앞에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가당키나 한 건지 모르겠으나 수민은 대책 없이 외로워져 버렸다. 그렇지만 외로움이 무슨 대수인가. 이삿날은 계속 다가올 것이고 결국 수민도 함께 엄마 집으로 옮겨질 것이다. 이제부터 눈감고 버려야 해. 매일매일 착착 버려야 해. 심장이 콩콩 뛰었다.
15
이사가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간단한 포장 이사로, 가지고 갈 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침대와 작은 테이블과 두 칸짜리 작은 책장만을 선택했다. 짐이 단출한데도 마음이 무거운 건 적지 않은 책 탓이 컸다. 수민은 깨끗하고 커다란 상자 하나를 구해다가, 곁에 두고 늘 봐야 할 책들과 크기가 작은 문구류들을 넣었다. 이건 자신이 쓸 방에 넣어 달라고 따로 말해둘 생각이었다. 나머지 책들은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엄마 집 한편에 상자째로 꺼내지 않고 쌓아 둘 것이었지만 그 양이 또 너무 많으면 엄마 잔소리를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지난 약 일주일, 내내 책과 씨름했다. 무거운 책들을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해가며 내다 버리고, 쓸만한 책들은 중고 서점에 직접 가져다 팔았다. 얼마쯤의 돈을 받아 집으로 오는 길엔 알 수 없는 허전함과 재미가 함께 느껴졌다. 재미만을 붙잡고, 집 가서 이 돈으로 피자 먹자, 하며 마음을 달랬다.
이즈음 새 선생님이 들어왔다. 적어도 열흘 정도는 인수인계를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새 선생님이 출근한 첫날, 수민은 각 수업별 파일을 전달한 후 교재 만드는 방식을 설명하고, 다음 달 도서 목록을 보여주며 그중 한 권을 골라 워크북을 제작해 보시라 했다. 그 옆에서 수민은 담당하고 있는 아이들별 특성과 그동안의 스토리를 간단히 작성했다. 아무도 시킨 적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해야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할 것 같았다.
근데, 서 선생님은 왜 그만두시는 거예요?
아, 엄마가 아프셔서요. 재택근무 할 만한 곳을 알아보니 다행히 자리가 하나 있더라고요. 앞으로 몇 해는 엄마께 시간을 많이 쓰려고 해요.
마음이 힘드시겠어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저 그만두고도 선생님 혹시 어려운 거 있거나 하시면 연락 주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 있으면 최대한 알려 드릴게요.
계시는 동안 제가 열심히 배워둘게요. 그만두신 분 귀찮게 해서는 안 되죠.
모든 것에 과함이 없는 좋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분해 보이는 후임자의 모습에 안심이 됐다.
2
마지막 근무일. 원장은 함께 점심을 먹자고 했다. 퇴근 후에 자리를 갖는 것보다는 편할 것 같아 내심 좋았다. 새로 온 선생님 환영 겸 수민의 송별 자리였다. 원장은 서수민 선생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 손이 잘 맞아 좋았는데 아쉽다며 되도록 좋은 말로 헤어짐의 자리를 잘 마무리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수민도 그간 이곳에서 일해서 참 좋았다는, 신중하게 포장한 말을 정성껏 건넸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평소대로 고 선생과 지하철역까지 함께 걸었다. 방금까지 웃으며 이야기 나누던 사람에 대해서도 돌아서자마자 상스럽게 욕하며 헐뜯는 고 선생이지만, 지난 몇 해 수민이 도움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기꺼이 도와줬다. 그 성격에 그래도 내겐 잘해줬구나, 고마운 마음에 수민은 이별 선물로 준비한, 평소 고 선생이 즐겨 쓰는 브랜드의 립스틱을 미리 써둔 편지와 함께 그의 손에 쥐여 줬다.
선생님, 그동안 참 감사했어요. 별건 아니지만 작은 선물이라도 드리고 싶어서요.
어머, 서 샘, 이게 다 뭐야. 나 눈물 나려 하네.
건강히 지내세요, 선생님. 연락드릴게요.
그래 우리 가끔 보고 그러자. 근데 샘, 있잖아, 나 늘 궁금했는데…. 솔직하게 말해 주기야.
네, 말씀하세요.
샘 코, 수술한 거지? 너무 티 안 나게 잘된 것 같아서. 어디서 했어?
수민은 크게 웃었다. 짐짓 유쾌해 보이는 웃음이라 고 선생도 따라 웃었는데, 그 웃음이 고 선생에게 어떤 대답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알 바도 아니지. 알맞은 이별이라 생각했다.
1
저녁 통화 때 엄마는 일찍 자라고 했지만 어림없는 소리. 수민은 아직도 짐들과 쓰레기들, 스스로에 대한 혐오와 한창 싸우고 있었다. 엄마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면, 수민은 이렇게 쏟아냈을 것이다. 엄마 들어 봐, 엄마 말대로 나 정말 더럽더라. 서랍장에 작은 나무 상자가 있었는데 그 안에 휴지 세 장이 정성껏 접힌 채 들어 있었어. 나는 왜 그 휴지를 버리지 않았을까. 아니 그 나무 상자 자체가 열 살 때인지 선물 받았던 거 같은데 그거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 편지 상자에도, 친구가 휴지에 써준 편지까지도 다 간직하고 있더라니까. 그런 것 정도는 차라리 사진으로 남기고 버려도 됐을 텐데. 나 휴지에 무슨 집착 같은 거 있나. 상담을 받아봐야 하는 거 아닐까. 대학 때 도서관 열람실 자리표도 모아 놨더라고. 너무 끔찍해, 난 정말 그냥 쓰레기야. 아니 엄마 그런데….
수민아, 엄마 사진 있잖아.
아무 말도 결국 하지 못하고 엄마에게 내일 보자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으려는 차였다. 갑자기 엄마가 사진 이야기를 꺼낸 건.
응, 엄마 사진은 갑자기 왜?
정말 버리고 와. 그 사진들, 느이 아빠가 집 나가던 날 짐 챙기다가 갑자기 앨범을 꺼내더라고. 진짜로 미쳐버렸나, 사진은 갑자기 왜 보냐고 소리치니까 거기서 내 사진을 골라서 꺼내데. 정말로 내 것만 빼내는 거야. 나중에는 몇 권의 앨범 안에 네 사진이랑 그 인간 사진만 남았겠지. 헤어질 마음도 내가 먹었고 그래서 이혼도 내가 하자고 한 건데, 사진 골라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찌나 분하던지. 지금도 모르겠어, 그 인간 왜 그랬는지. 집 나가는 거 보고 문 다 걸어 잠그고 남아 있는 사진들 그냥 눈에 보이는 아무 봉투에다가 넣어 놓은 거야…. 수민이 네 어릴 때 사진은 나중에 아빠한테 달라고 해. 그래도 사람이 추억이 있어야지. 근데 내 사진은 혹시 지금 못 버리고 있거든 꼭 버려. 네가 버려 줘.
부모님 이혼 후 집에 앨범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은 건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엄마가 어디 치워 뒀거나 아빠에게 가져가라고 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구나. 아빠의 기괴하다면 기괴할 그 행동은 차라리 이해가 됐다.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아직까지도 앞으로도 수민이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엄마였다. 그가 아는 한 가장 똑똑하고 분명한 사람. 그런 사람이 이렇게 무른 모습을 보일 때면 발끝이 젖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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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민은 밤새 잠을 못 잤다. 사실 아무래도 엄두가 나지 않아 엄마 사진들은 일단 봉투 그대로 가지고 가려 했는데, 엄마가 버려 달라 하자 오히려 정리할 기운이 생겼다. 사다 놓은 사진첩에 엄마 사진을 한 장 한 장,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시간 순서에 맞게 정리해 넣었다. 수민이 가장 좋아하는, 엄마가 자신을 안고 있는 사진은 따로 평소 가지고 다니는 수첩에 꽂아뒀다. 집에 가서 액자에 넣어둘 작정이었다. 중요한 책들만 담은 상자에 엄마의 사진첩을 같이 넣어서 테이프로 붙였다. 그리고 나머지 쓰레기와 잡동사니들을 온 힘을 다해 버리고 아침을 맞이했다. 이삿짐이 모두 차에 옮겨 실리는 것을 본 수민은 기차 시간에 맞춰 역에 도착했다. 예약한 좌석에 앉고 십 분쯤 지났을 때 기차가 출발했다. 지난 한 달의 시간이 꿈이었나 싶고, 잠을 한숨도 못 자 자꾸만 다리가 붕 뜨는 것만 같았다. 엄마에게 이제 기차 출발했다는 문자를 남기고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자다 깼을 땐 기차가 출발한 지 30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손에 쥔 핸드폰 진동 탓이었다.
[서 샘, 지금 통화 가능해?]
고 선생의 문자였다.
[그 새로 온 선생 있잖아, 완전 미친년이야 글쎄 그…]
수민은 다음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폰을 엎어 둔 채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의 풍경과 그의 붕 뜨는 다리, 무엇 하나 모르는 저편에서는 자꾸만 메시지가 왔다. 진동이 시끄럽게 좌석 탁자를 울려댔다. 수민은 천천히 핸드폰을 손에 들고 대화창을 꾹 눌러 삭제한다. 다시 도착하는 메시지. 무어라고 볼 틈도 없이 이번에는 조금 빠르게 고 선생의 번호를 찾아 차단한다. 기차는 터널을 나고 들며 착실하게 분주하다.
어느 날, 친구가 무엇도 잘 버리지 못하는 스스로를 몹시 책망하며 '못 버리는 여자'에 대한 소설을 좀 써 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엔 그저 웃어넘겼는데 그 말이 자꾸만 생각이 났어요.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 마음과 간직하려는 마음. 그 사이를 가만 바라봅니다. 언젠가는 같은 제목의 다른 소설도 쓰고 싶네요.
소중한 제 친구에겐, 너무 자신을 답답해 말라 말해 주고 싶습니다. 우리들은 타고나기를 잘 버리질 못하는 사람들. 그게 또 제법 사랑스럽기도 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