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신 보지 말자 우리
서른 후반 여름에 알게 된 그녀,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알고 있었나 싶을 정도의 기시감.
10년 결혼 생활의 종지부를 찍고 홀가분했는지, 여러 남자 사람들과 어울리며 "나 진짜 남자 많아요"라고 우쭐거리듯 그녀는 내게 으스댄다.
어린 나이에 겪었어야 했던 순수한 연애 경험도, 5개월 이상 깊이 있게 만난 사람도 없었으며 늘 깊어질 때쯤 본인이 남자에게 이별 통보 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던 그녀.
찰나의 욕망보다 마음이 머무는 입맞춤이 더 깊게 스며듦을 조금씩 깨달아갈 나이에
그녀와 교외 드라이브를 가고, 인생 네 컷을 찍고, 코인 노래방에서 듀엣곡을 부르는 소박하디 소박한 나의
바람이 무색할 만큼 그녀는 나와의 아슬아슬한 거리감을 절묘하게 유지했다.
"너와 산책은 하고 싶은데, 저녁은 먹고 싶지 않아." 또는 "커피는 마시고 싶은데, 다이어트 중이야"라고 말하며 주말에는 다른 모임에서 만난 남자들과 술과 양고기를 즐겼다는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그녀.
어쩌다가 밤 열두 시가 지난 새벽녘 만취해 내게 전화 걸어, 너무 취했는데 데리러 와 줄 수 있냐는 말 뒤로
"다른 남자들과 놀다가 네가 생각나서 너한테 연락했어 나 잘했지?"라고 맨 정신엔 절대 마주하지 못할
그녀의 뒤틀린 진심을 야트막이 표현한다. 마치 치즈스틱이 오버 쿡되어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온 치즈처럼.
그녀의 기행(?)을 묵묵히 받아 낸 것이 빛을 발했는지, 그녀가 맨 정신에 내게 말한다.
"전 남편도, 가족들도 나를 이렇게 까지 이해해 줬던 사람이 없었는데, 너는 나를 오롯이
이해해 주는 것만 같아."
내게 주구 장창 아프다고 얘기는 하지만, 내가 약을 챙기는 것은 싫어했던 그녀.
그 와중에 내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을 질투하던 그녀.
내가 그녀를 너무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기 좋은 일진을 물어보던 그녀.
내 성격을 아주 잘 아는 지인들은, 그녀의 기행을 듣고 당사자인 나보다 더 몸서리치듯 열변을 토한다.
그럼에도 나는 온라인 게임의 다음 Stage를 준비하는 사람처럼 그녀를 이해하고 분석하며 감정의 근육을 키워갔다.
나의 다짐이 관용의 허세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하는 어떤 질투 유발과 감정 Test에도 묵묵히 견디는 나에게 오히려 역으로 의지하게 될 것이 두려웠는지, 그녀는 내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버렸다. 그것도 아득하게.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녀는 또다시 만취 후 내게 전화 걸어 도통해서는 안될 이야기를 술기운을 빌려
토해낸다.
"우리 이런 관계 너무 스트레스받아, 우리 자보고 계속 만날지 말지 결정하자. 너와 비교하려고 다른 남자와도 깊어졌거든."
우연이 겹쳐서 필연이 된 건지, 필연의 서사를 위해 우연이 연속 작용 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만약 두 새벽에 내가 깊이 잠들어서 전화를 못 받았다면, 내가 그녀의 기행에 관용의 허세로 대응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녀의 존재를 영영 몰랐다면 불유쾌한 에피소드가 발생하지 않았을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후 그녀는 나를 너무 좋아하게 돼버려서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이토록 친밀하고도 잔인한 진심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더는 술김에 내게 연락하지 않기 위해 연락처를 지우겠다고 통보한 뒤 홀연히 사라졌다.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도 에스프레소보다 쓰디쓴 에피소드로 남아 있지만, 홧김에 찾아간 신점집에서 무당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둘이 인연이 깊은 건 아닌데, 도통 끊어지질 않네 서로가 서로를 차단한다고 해도 시일이 지나 언젠가 다시 만날 운명이야."
지금 내가 회상하는 그녀는 마치 봄날은 간다의 은수와 같은 여자다. 눈망울이 크고 성격은 시원시원하고, 작중 은수 또한 이혼의 아픔이 있으며, 정신 차리고 보니 이영애 배우와 외모도 상황도 흡사 닮아 보인다.
노희경 작가는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한다.
"순수가 사랑을 얼마나 방해하는지 모르는 사람만이 순수를 동경한다고"
어쩌면 서른 후반, 이제 마흔을 앞둔 나이에 그녀의 모든 것을 수용하고자 한 내 무모한 순수함이 버거웠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은 내게 너무도 찬란한 무채색으로 남아있다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와의 이별 이후 영 관심 없었던 주제의 봄날은 간다가 내 유튜브 쇼츠에 등장하고
15년 전 군생활 동안 숱하게 읽은 책 중 기억에 남는 몇 안 되는 노희경 작가의 책을 오늘에서야 다시 읽었는데 봄날은 간다에 대한 에피소드가 등장한 것이 결코 운명이 아니라면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노희경 작가의 책 중 내게 가장 와닿은 문장을 통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더 사랑했다 한 들 한 계절 두 계절이고, 일찍 변했다 한들 평생에 걸치면 찰나일 뿐이다. 모두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다 괜찮다"
P.S 아무리 생각해도 썅년인 건 맞잖아.
P.S(2) 선녀님 제발 인연이 아니라고 해주세요 취소 퉤퉤퉤
P.S(3) 인상 깊게 봤던 먼 훗날 우리 영화 속 작중 이언이라는 게임 캐릭터가 캘리를 끝내 찾지 못할 경우 온 세상이 무채색으로 변한다. 2025년 11월 지금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