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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찰의 문은 열려 있다. 하지만 도달 가능한가

지방 정부사업 안에서 신생 창업자가 마주하는 구조적 거리

by 이니프

지방의 정부사업 입찰 구조는 겉보기엔 평등하다.
공고는 공개되어 있고, 응모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 문을 통과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글은 그 경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리고 왜 그 경계가 단순한 역량 차이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지를 이야기한다.


제도의 기준은 ‘형식’이지만, 현실의 조건은 ‘관계’다


정부사업 입찰은 제안요청서(RFP)를 기반으로 이뤄진다.
요구사항은 정해져 있고, 평가 항목도 명시되어 있다.
경험, 수행 역량, 전담 인력, 관련 면허… 모든 항목은 공정한 판단 기준을 갖추려는 의도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 기준은 신규 창업자에게는 사실상 출발선 이전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경력이 없기 때문에 참여할 수 없고,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경력이 생기지 않는 구조


일부 사업은 면허를 필수 요건으로 명시하는데,
면허 발급 자체가 일정한 실무 경험을 요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구조는 결국 새로운 주체들이 ‘경험이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배제되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된다.


지방에서 이 구조는 더 명확하게 작동한다


수도권에서는 다양한 민간 기획사, 청년 단체, 협동조합, 1인기업이 제안자로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열려 있다. 경쟁은 치열하지만 진입 통로도 복수다.

반면 지방에서는 그렇지 않다.


특정 사업은 동일한 업체가 수년간 반복 수주한다

행정 부서와 비공식적으로 축적된 신뢰 관계가 평가에 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다


지역 내 전문 인력 풀이 제한적이다 보니 ‘익숙한 기획’이 ‘새로운 기획’보다 안정적 선택지로 간주된다.

입찰이 단순히 제안서 경쟁이 아니라 ‘과거에 같이 일해봤던 사람에 대한 재신임 과정’처럼 작동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구조의 고정성은 창업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신생 창업자, 특히 지방에서 자리 잡으려는 창업자들에게 입찰 시장은 현실적 수익 모델이자 사회적 신뢰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진입 자체가 어려워지면,


실적을 만들 수 없고

제안서를 쓸 기회도 없고

행정과의 협업 경험도 축적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사업 기획의 역량이나 실행 감각과 무관하게,
입찰이라는 구조 자체에서 ‘새로운 주체’는 자리를 잡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전략이 있다면


신생 창업자가 이 구조 안에서 작게 진입할 수 있는 통로는 몇 가지 있다.


입찰 대상이 아닌 민간 제안을 통해 현장을 설득하는 방식

기존 기업과의 수평적 협업을 제안하는 방식

입찰 외부에서의 실행과 기록을 통해 후속 수요를 발생시키는 방식


이 방식은 단기적으로는 시간과 비용이 더 든다.

하지만 성과 중심 평가에 대한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실험적 통로가 되기도 한다.


구조적 변화는 ‘제도 개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경력 요건 완화, 신생 기업 가점 부여, 서류 기준 간소화 같은 제도 개선은 일정 부분 효과가 있다.
하지만 실제 문제는 제도와 관행 사이에 있는 간극이다.


새로운 기획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부 문화

실패를 감내할 수 있는 평가 구조

관계가 아닌 실행으로 신뢰를 축적할 수 있는 시스템


이것이 없다면, 형식은 열려 있어도 실질적 기회는 여전히 제한된다.


입찰 구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구조가 현재 누구를 포함하고 누구를 배제하는지를 들여다봐야 한다.

지방에서 창업자는 늘 선택의 여지가 좁다. 사업의 대상도, 파트너도, 시장도 작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나의 사업, 하나의 기회가 가지는 무게는 더 클 수밖에 없다. 그 기회를 처음부터 가질 수 없는 구조라면, 단지 개선이 아니라 설계 자체를 다시 묻는 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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