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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i were there Dec 31. 2020

[05] 자가격리, 하루키, 불투명한 일상

2020년 말 격리 속 나들의 이야기 - 05



자가격리 기간 중 대부분은 아침 9시 50분에 일어난다. 굳이 이 시간에 일어나는 이유는 10시에 업무 화상회의가 빈번한 탓도 있지만, 10시에 ‘자가격리 안전보호’ 앱에 자가진단 결과를 기록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거주하는 지방정부에서는 오전 10시와 오후 8시, 하루 두 번 자가진단 결과를 기재하게 했다.





출근하지 않는 데도 정해진 시간에 알람을 맞춰 일어나서 동일한 행위를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은 사뭇 특이한(?) 경험이다. 물론 회사 출근을 위해 매일 9시 40분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옷을 챙겨 입고 나가는 행위를 수년간 반복하고 있지만, 그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일종의 생존 신고랄까. 앱 저편에 있는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느낌에 가깝다(어쩌면 감시일지도 모르지만).


동일한 행위의 반복. 기계처럼 반복되는 행위와 자가격리가 안겨준 오래간만에 자유로운 독서는 이러한 반복에 어떤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뭐랄까 뭔가 ‘하루키스럽다’고 해야 할까. 그의 책에 등장하던 매번 아침 일찍 일어나 칼라티셔츠와 치노 팬츠를 챙겨 입고, 재즈 음악을 틀어놓고 커피메이커로 커피를 내리는 주인공들을 떠오른다(물론 나의 아침은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의 아침보다 단조롭다. 난 일어나서 앱에 ‘아니요’ 버튼을 누르고 체온만 적어 넣을 뿐이다. 옷을 차려입지도 음악을 켜지도 않는다).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참 좋아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누군가가 빌려주었던 『상실의 시대』를 읽었을 때부터 그를 좋아했다(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란 제목도 좋지만 뭔가 이 책의 색에는 상실의 시대란 제목이 더 잘 어울린다. 물론 주관적인 해석이지만). 내게 그 책을 빌려줬던(선물해주지 않았다. 자신의 책을 빌려주고 다시 돌려주라고 했다) 친구는 『상실의 시대』 주인공이 나랑 비슷하다고 했다. 주인공이라니 기쁜 마음에 고맙다고 책을 받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정말 비슷하다고 느꼈다. 어떤 부분을 비슷하다고 느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뭔가 ‘허무한 느낌’이 닮았다고 해야 할까.


많은 “색채가 없는” 인간들은 하루키 소설 속 주인공과 자신을 등치 시키곤 한다.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어떤 상실을 안고 상실 속 살아간다. 그 상실과 거리를 두려고 하지만 그 상실은 형언할 수 없는 어떤 현상들로 계속해서 내 앞에 나타난다. 때론 그 상실을 벗어나 ‘알’에서 깨어나곤 하지만 대부분은 그 현상들이 다 지나가도 내 상실은 그대로 남아있다.


(쓰다 보니 장황하다. 어쨌든) 동일한 행위의 반복으로 인한 하루키적 사고 전개는 오랫동안 손에 잡지 않고 방치했던 『기사단장 죽이기』를 집어 들게 했다. 하루키를 소름 끼치게 애정 했던 2017년의 나는 출판 전 예약까지 해가면서 책을 구매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책은 그렇게 우리 집 책장에 3년을 방치당했다. 그 3년 동안 발생한 내 삶의 급변이 하루키를 집어 들지 못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하루키를 다시 만난 것은 어쩌면 자가격리 기간 중 가장 뜻깊은 일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주인공과 비슷하다고 느꼈던 시간들과 나도 그림자가 사라져 세계의 끝에 다녀와야 한다는 망상들, 스스로에게까지 관조적 태도를 견지했던 시간들을 다시 떠오르게 해주었다. 놀라운 것은 그 시간을 지나 현재의 나는 그때의 나와 닮았지만 닮지 않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해주었다는 것이다(브런치에 방점의 기능이 있다면 ‘닮았지만 닮지 않는’에 찍었을지도. 아니 ‘새삼스레’에 찍었을지도).


“빗물을 머금은 나뭇잎의 묵직한 초록”. 큰 의미가 있는 문장은 아니지만 『기사단장 이야기』에서 해당 문장을 만났을 때 새삼스레 놀랐다. 그동안 글이 써지지 않는다고 손의 게으름만 탓하다 자가격리라는 여유와 버지니아 울프의 독려(?)로 자가격리에 관한 글을(기록을) 쓰는 중이라 더욱 새삼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어떤 문예창작과 교수님은 문학적 글쓰기 관련한 첫 수업에 길가에 난 잔디 혹은 잡초의 색을 50여 가지로 표현해보라는 미션을 부여한다고 한다. 괜히 그 기억이 스쳤다. 그리고 그 기억이 주입되었던 시간도 스쳤다. (이런...) 자가격리를 통해, 그리고 하루키를 통해 나들을 마주한다. 과거 나들을 만나면 한없이 수치스럽다. 기억들이 손가락을 다시 아프게 한다.


아.... 이래서 하루키가 좋다(아니 싫다).



‘글쓰기가 당분간 좋아지겠군’이란 생각이 밀려든다. 생각이 밀려드는 황홀의 순간은 언제나 불안하다. 주식 같다. 내 황홀은 어딘가 비슷한 수준의 상실을 파생하는 것 같다.


 “띠링”. 불안하게 메시지가 날아든다.



“인후염 증세가 생겨 어제 OO구보건소 추가 검사를 받았습니다. 보건소 결과를 지금 유선으로 통보받았는데 양성으로 나왔습니다. 조사하고 시설로 옮겨질 것 같습니다.”



확진 판정을 받은 동료와 밀접접촉하여, 함께 자가격리 조치를 받은 또 다른 동료가 자가격리가 다 끝나가는데 증상이 나타났다. 코로나19, 다시 일상적인 삶을 뒤흔든다('일상적인'에 방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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