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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만들기에 대한 단상

by 권단

마을은 그냥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다. 마을의 낙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러면 그 개발과 발전, 선진이란 이름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

진보란 또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앞으로 더 나아가는 것일까?


마을에 돈이 돌아야 한다는데 그래야 살 수 있다는데 삶터를 순식간에 일터로 바꿔야 할까?

그러려면 이젠 치장해야 겠지.

삶터를 관광지로 하든, 생태공원을 하든, 또 농산물 판매장을 만들든, 체험 농원을 만들든 누굴 위한 걸까? 마을을 통째로 잔뜩 포장을 한 채 누군한테 어디에다 갖다 팔려고 하는 것일까?

되도록 부가가치가 높게 그래서 돈을 많이 벌도록 그렇게 해서 벌은 돈 다 어디에 쓰려고 하는 걸까?

그냥 마을기금으로 또 개발의 자금으로 아니면 또이또이 해서 나눠먹는 것으로 아니면 다 같이 물건너 관광이라도 아직도 잘 모르겠다.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마을 만들기인지를...


지금 체제는 여러모로 생활공간을 자꾸 잠식해가고 있다. 시군단위 행정체제에서는 읍 중심의 개발로 모든 예산을 허비하면서 그것이 전체 군발전이라 이야기 한다.

면은 몇개의 특화 품목과 관광지의 예산 배정으로 가름하고 있다.

국가에서는 생활공간을 돌아보기보다 더 미세한 마을만들기에 집중하고 있다. 그 마을은 서로가 경쟁하고 있고 경쟁대상이 되고 있다. 어느 마을은 무엇으로 지정됐고 어느 마을은 무슨 사업이 되서 돈을 얼마 가져왔다면서 그것은 마을 이장의 능력으로 치부되며 마을마다 묘한 긴장감을 감돌게 하고 있다.

경쟁의 패러다임에 구겨 넣은 것이다. 마을마다 사업을 따내려 갖은 포장과 피터지는 경쟁을 하면서 국비와 도비와 군비를 쓰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

컨설팅 회사들이 이를 부추기고 군에서는 성과와 실적으로 이를 남기고 있다.

입간판 세우고, 건물 세우고, 갖가지 체험 프로그램 만들어놓고 농산물 판매 영업 찌라시 영업 호객행위 하면서 그리고 동네방네 홍보하면서 돈을 끌어모으려 하고 있다.


마을도 팔아야 사는 좌판에 나선 것이다. 이렇게 중간 단위의 생활공간은 안팎으로 위협받고 있다.

밖으로는 생활공간보다 더 크게 짜여진 안 맞는 옷처럼 걸쳐진 시군단위 행정체계에 의해 짓 눌리어져 있고 안으로는 국가가 조장한 마을 만들기 경쟁대열에 서서 생활공간으로의 고민보다는 자체 사는 마을을 선진 새마을로 바꾸기 위해 출발선 상에서 긴장하고 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이다.


'땅' 총소리는 울린지 오래고 어떻게 하면 빨리 달릴까 선진 새마을의 대열에 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다. 자연마을의 이름은 점점 더 희미해져 가고 행정리동과 법정리동만 남아 있을 뿐이다.

모범마을과 범죄없는 마을만 남아있을 뿐이다. 우수마을과 선진마을만, 부자마을만, 체험마을만 남아있을 뿐이다. 크게 크게 그렇게 묶어서 사업이 되는 마을만 살아남는 것이다.

그것이 공원이 됐든, 관광지가 됐든, 체험농원이 됐든, 농산물 판매장이 됐든지 간에 살아남는 것이 장땡인 것이다.


그렇게 서로를 경쟁상대로 각개 약진하면서 우리의 생활공간은 안팎으로 맘껏 유린되고 있다.

마을에 돈이 돌지는 몰라도 생활공간의 경제는 더 없이 취약해졌다.

이미 자급의 기틀인 장터가 사라진지 오래됐고 수많은 버스 노선은 생활공간을 순환하기 보다 읍으로 도시로 빠져나가는 빨대 구실을 했다. 그렇게 마을에 들어온 돈은 또 그렇게 고스란히 나가곤 했다.

마을이 수많은 미디어에 노출되어 그 이름값이 올랐을 지 몰라도 자체의 소통구조는 엉망이었다.

미디어에 오르내린 이름만 한없이 높아졌고 그 이름 쫓아 수많은 지역에서 찾아오더라.

그 사람은 명망가가 됐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들러리가 됐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마을이 미디어에 알려졌지만서도 마을 자체의 소통구조는 더 험난해졌다.

생활공간의 분위기는 더 삼엄해졌다. 마을마다 성적표를 받듯이 우수 마을과 못난 마을이 알음알음 정해졌으며 못난 마을은 왠지 모를 죄책감으로 패배의식으로 피해의식으로 시달려야 했다. 가뜩이나 어려운데 그렇게 아무렇게나 낙인 찍는 그런 도장을 거부할 힘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활공간은 피폐해졌고 맘껏 유린됐다.

시군단위의 일극구조의 정책으로 잘 사는 놈 밀어주자, 잘 되는 놈 밀어주자의 그 정책으로 변방은 끊임없이 소외되었으며 면 단위 생활공간은 그냥 행정체계로 거느리며 면적만 넓혀주는 기실 그들에게는 그렇게 돈이 안 되는 곳이었던 것이다.


국가는 마을단위 정책을 조장하며 생활공간을 흐트러놓았다.

전국에 있는 모든 마을을 경쟁의 대열에 올려놓았다. 이건 포장만 바뀌었을 뿐 자발성을 강요하는 것일 뿐 새마을운동과는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자발성을 강요당한 마을 주민들은 컨설팅회사와 공무원과 빌붙어서 서로의 잇속 챙기기로 그렇게 아구가 맞아 수많은 사업계획이 양산되었고 그렇게 풀려진 돈은 누군가의 입으로 촥촥촥 들어갔다.

그 논의구조에서 소외된 이들은 또 그렇게 버려지고 들러리가 되었다.

이처럼 자급, 자치 단위로 기능할 수 있는 읍면단위 생활공간을 한번도 제대로 사유하지 못하고 성찰하지 못하고 그냥 앉아서 맥없이 찌르면 찌르는 대로 그렇게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권역별로 지멋대로 묶어 찢어 발기기도 했고 마을별로 수없이 경쟁을 시키기도 했다.


인위적인 그것은 절대 지속가능하지 않았다. 그렇게 보이려 포장만 할 뿐


마을은 그렇게 박제화 된 상품이 되었고 정치체제에 아무런 위협을 주지 않는 그은 선 안에서 그렇게 놀게 만드는 그런 정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듬어진 것이다.

하지만 생활공간의 자급과 자치를 고민했을 때는 달라진다.

이것은 당장 제도를 위협하는 작금의 정치를 위협하는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공산이 크다.

아마 그런 정치적인 이유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행정체계가 읍면단위를 아무런 기획 실행 기능이 없는 군 단위에서 시키는 일만 추진하라는 수직 위계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면단위 생활공간을 식민지로 건사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전국 각 지역에서 수많은 생활공간이 다시 살아나서 꿈틀대기 시작하면 권력들이 수많은 토호들에 가지치기를 하며 건사했던 자기네 정치지형이 뿌리째 뽑히는 준동이 일 것이고 요동칠 것임을 우려할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간절한 필요에 의해 생활공간은 억압받고 있다.

제대로 된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제 정말 우리는 우리의 생활공간에 대해 사유하고 성찰해야 할 것이다. 내 주위를 둘러보고 생각하자.

그리고 우리의 생활공간과 자치구역을 스스로 설정하자.

그리고 만나고 논의하고 연대하자.

거창하지만 진정한 독립운동은 자립운동은 자치, 자급운동은 지금부터 시작일는지 모르겠다.

최소한의 기본과 기초가 되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지금 우리는 충분히 최전선에 서 있다.

국가와 자본이 낼름 낼름 혀를 내밀고 골목마다 마을마다 진입을 시도하고 이미 상당부분 내몰리고 점령당한 상황에서 지금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생활공간, 자치구역을 회복하자. 그것을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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