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우리나라 지방자치의 역사 - 옥천군지를 중심으로
이렇게 생활공간과 자치구역의 수탈에 대한 통치구역과 행정구역에 대한 역사는 나만의 독자적인 관점이 아니다. 이미 역사적인 자료로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1994년 지방자치 민선자치단체장을 뽑기 이전에 관선군수가 편찬위원장으로 있었던 옥천군지의 내용을 보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나라 지방자치의 역사의 흐름이 오롯이 담겨있다 볼 수 있다. 일단 옥천 군지의 부분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 보자.
옥천군지(558p)에 살펴본 면단위 행정체제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면제의 실시는 조선초기 15세기경 권농관이 배치되면서부터이다. 이 때의 면은 행정구역이 아니라 일종의 지역자치단체였다. 당시 면의 장은 면임, 방도, 풍헌, 집강, 관령, 도윤 등으로 불리었으며 면민에 의해서 공선되었다. 면이 행정구역으로 제도화된 시기는 1910년 한일합방후 조선 총독부가 ‘지방관제와 면에 관한 규정’을 제정한 때 부터이다. 1913년에는 면사무소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면 부과금을 징수할 수 있게 하고 1914년에는 면적 4방리, 인구 800명을 기준으로 전국의 면을 통폐합 조정과 동시에 면에는 면장 서무 및 기술을 담당하는 서기와 일본어 통역생을 두었다. 1917년에는 면제를 제정하여 면 행정의 자문에 상담역을 위촉하였으며 1920년에는 부의 성격을 지닌 면을 지정면으로 기타면을 일반면으로 구분하고 면장의 자문 기관으로 면협의회를 두었다. 1931년에는 면제를 개정하여 지정면을 읍으로 승격시켰으며 1943년에는 전시체제의 면행정을 강화하기 위해 부면장제를 두었다. 1948년 11월 17일에는 ‘지방행정에 관한 임시 조치법’의 제정에 따라 면은 자치단체가 되었으며 면장은 민선으로 선출되었다. 1951년 12월15일에는 직제를 개편하여 면에 면장과 부면장, 밑에 서무계, 재무계, 호적계, 산업계를 두었다가 1959년에는 7대계로 확대하였다.]
지방자치제가 현행 시군단위 체제로 자리잡게 된 것은 불과 100년도 안 되었고 이 마저도 일제의 침략에 의한 경술국치로 인한 인위적으로 식민지를 통치하기 편리하게 만들어진 역사적인 배경에 의한 것이지 자연스럽지 않았다는 것을 옥천군지는 말해주고 있다. 옥천군지에 실린 지방자치제에 대해 살펴보자.
[지방자치는 조선최에는 향청, 그리고 중기 이후에는 향약제도를 기반으로 농촌의 자연발생적인 촌락구분인 면, 리 등의 자치조직으로 분화변천되어 오다가 갑오경장 이후 행정제도가 개혁되면서 우리나라 지방행정제도에는 향회제도가 도입되었다. 1895년(고종 32년) 11월3일 반포된 향회조규 및 향약판무규정에 의하여 채택된 향회제도는 지방주민으로 하여금 지방 공공 사유의 처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의미의 지방자치의 효시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향회제도는 자기 선임의 원칙과 임기제 및 명예직제 등 근대적 지방자치제를 내용으로 하는 획기적인 제도였으나 한일합방으로 인해 발전하지 못하고 폐지되었다. 그 후 제도적인 지방자치조직은 몇가지 형태로 존속되어 왔으나 중앙에서 파견된 강력한 권한을 가진 지방관에 의해서 전반적인 행정이 수행되어 왔으므로 지방자치 조직은 국가의 지방행정 조직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의 지방자치제도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법적으로 정비되고 보장된 자치제도를 갖추지 못하였다. 법률적, 제도적인 지방자치의 시초는 1910년 한일합방이후 일제가 조선총독부 관제와 지방관제를 공포한 뒤 1913년 부령 제111호호 도의 관할구역과 부, 군, 면, 동리의 명칭 및 관할구역을 대폭 조정한데서 비롯된다. 이때 조정된 각 지방행정구역의 명칭과 규모가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옥천군지 604-605장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시군행정체제는 결국 일제의 인위적인 행정체계가 여전히 존속되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계속 살펴보자.
[1913년 제령 제7호 부제에 의하여 부가 최초로 법인격을 부여받았다. 1930년에는 전면적인 지방제도 개정이 단행되어 과거의 지정면이 읍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도와 읍에 법인격이 부여되었으며 도, 부, 읍에 의결기관인 도회, 부회, 읍회(면에는 면 자문기관인 면협의회)가 설치되어 독자적인 사무와 재정권, 그리고 입법권(조례와 규칙)을 인정하고 집행기관과 분리된 의결기관으로 공선, 명예직 의원으로 지방의회를 구성함으로써 근대적 지방의회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옥천군지 605장
하지만, 이는 법적으로 형태만 갖춘 것일 뿐 실재적인 자치조직으로 기능하지 못했음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자치조직이 아니라 효율적인 식민지배를 위한 것이라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방의회는 일제 말기인 1943년 의회의원 정수에 대한 일제당국의 후보추천제의 실시로 관치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방자치 본질의 시각에서 엄밀히 분석한다면 그 당시 지방자치는 민주적 의식의 주민 자치라기보다는 식민정치에 대한 정치적 합리성을 획득하거나 효율적인 식민지배를 위해 실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도입초기의 특성은 이후의 우리나라 지방자치제도에 나쁜 영향을 주게 되었다. ---지방자치에 있어 정치적 특징은 일제에 의하여 실시된 식민통치시의 지방자치 행정조직과 형태가 해방이후는 물론 현재까지도 유지, 존속되어 아직까지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해방직후부터 정부수립시까지는 미군정 당국에 의하여 일제식민시대의 지방행정제도가 그대로 존속되면서 우리의 지방자치법이 제정된 1949년까지는 별다른 법적 변천없이 적용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일본의 지방자치법이 직접적으로 우리나라 지방자치법 제정에 끼친 심대한 영향이다. 우리의 지방자치는 제정시부터 일본의 지방자치법을 우리의 여건을 고려하지 않은채 무분별하게 모방하였다. 그리고 이를 시행함으로써 성숙되지 못한 사회적 환경, 즉 주민자치 의식의 부족과 시행착오로 개정과 보완의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결과를 낳았다. 급기야는 지방자치가 비능률적이고 망국적인 제도로 오인되어 중단되는 시련까지 겪었던 것이다. 국가의 상황여건을 고려하지 않은 제도나 법의 무분별한 이식이 시행착오의 비능률성은 고사하고 정치전반에 걸친 악영향과 체제 자체에 대해서까지 회의론적 발상이 제기되고 심지어 부정론까지 대두되는 등 민주정치 발전에 너무나 큰 손실을 가져왔음은 체험한 바와 같다.] 옥천군지 606장
일제에서 흉내만 낸 무늬만 바꾼 지방의회에 대해 옥천군지가 내린 평가를 보면 탄복할 수준 아닌가.
‘지방자치의 본질의 시각에서 엄밀히 분석한다면 그 당시 지방자치는 민주적 의식의 주민 자치라기보다는 식민정치에 대한 정치적 합리성을 획득하거나 효율적인 식민지배를 위해 실시된 것이라 볼 수 있다’는 분석과 아울러 ‘이러한 도입초기의 특성은 이후의 우리나라 지방자치제도에 나쁜 영향을 주게 되었다’는 분석까지 딱딱 들어맞는 것이다. 당시 지역에 살았던 풀뿌리 보수의 향토사학자들까지 지방자치와 주민자치에 대해 이런 놀라운 역사적인 통찰을 보여준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부터 존재했던 자연스런 지방자치가 일제시대 때 우리 지역의 실정과 역사적인 흐름을 무시하고서 일제의 지방자치제를 그대로 도입하고 식민통치 지배를 효율화하기 위해 제도를 악용하면서 우리나라 지방자치제의 근대화는 상당부분 시작부터 잘못됐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근본적인 제도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지방자치와 주민자치라는 가치에 타격을 주어 지방자치제가 폐지되기도 하는 수난을 겪었다는 설명이다.
[1949년 7월4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 헌법인 제헌헌법을 제정 공포하게 되는데 여기에서는 헌번 제96조 동법 제 97조에서는 자치조항으로서 지방의회의 구성을 통한 지방자치제에 따른 조항을 규정하였다. 이 법은 1949년 8월15일을 기해 시행하게 되었는데 주요내용은 지방자치단체의 종류는 2종 3층제로 하였다. 서울특별시와 도를 한 종으로 시, 읍, 면을 또 다른 한 종으로 하고 세계의 층위로 나눈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의 구역은 국가의 지방행정구역으로 하되 군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제외시켰다. 당시 지방정부 형태는 의회와 집행기관장을 별도로 두는 기관분립 형태였고 기초자치단체장은 의회에서 간접선거로 서울특별시와 도의 자치단체장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이중 규정을 두었다. 자치단체에는 자치입법권, 자치재정권, 자치조직권을 인정했다. 1956년 2월13일 지방자치법 2차 개정에는 서울특별시장과 도지사는 종전대로 임명제로 하되 시, 읍면장과 동 이장은 주민이 직접 선출한다는 규정이 명시되어 있다. 이는 58년 4차개정때 모두 임명으로 바뀌었다가 60년 5차 개정에는 다시 직선제 임기 4년으로 바꾸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하지만, 1961년 5월16일 군사 쿠데타는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면적인 기능이 마비되고 지방자치도 사실상 폐지되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포고문 제4호를 발표하여 지방의회를 일제히 폐지함과 동시에 동년 5월22일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포고문 제8호로 지금까지 지방의회를 거쳐 시행하던 의결사항에 대해 읍, 면에서는 군수, 시는 도지사, 서울특별시와 도는 내무부장관의 승인을 얻어 집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동년 6월6일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령 제42호로 도지사, 서울특별시장 및 인구 15만 이상의 시장은 내각이 임명하고 기타 지방자치단체장은 도지사가 임명하도록 하였다. ---이상과 같이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의 제정 및 개정은 한국의 지방자치를 사실상 유보시킨 조치이며 현재까지 지방자치가 성숙되지 못하게 한 암흑기의 시작이었다. --1972년 유신헌법에는 지방자치에 관한 조항을 제 114조와 115조에 명시했는데 동법 부칙 제10조에서는 “이 헌법에 의한 지방의회는 조국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구성되지 아니한다”라고 규정 명문화함으로써 지방자치의 실시를 남북통일만큼이나 요원한 과제로 중지시켜 놓았다. 이런 유신헌법은 우리나라 정치사에 악영향 못지 않게 당시의 표현대로 ‘한국적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민주주의 기초인 지방자치를 국민의식에서 말살시켜버렸다. 이에 대한 명분은 이른바 통일을 위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반국가적 행위에 버금가는 것이다. 이를 통해 유신헌법은 능률을 통한 강력한 중앙집권 형태를 표면적으로 취하게 되었다. ] 옥천군지 610-613장
이후 9차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1991년 3월26일에는 전국 158개 시군, 자치구별로 4천304명의 기초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선거가 실시되었다.
조선시대 자연스레 발생된 읍면자치제는 일제의 경술국치로 인해 35년 남짓 그대로 멈췄다가 해방이후 다시 등장했지만 1961년 516쿠데타로 다시 폐지된 이후 30년이 지난 91년에야 비로소 시군 자치제로 변화되어 버린 것이다. 옥천군지에서는 우리나라 지방자치 역사가 일제침략기를 거쳐 어떻게 왜곡되고 굴절되었는지 소상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런 과정이 생략된 채로 무리하게 인위적으로 추진하다보니 지방자치의 원뜻을 살리지 못한 채 실행됐고 이 때문에 지방자치제가 마치 이상적인 제도 인양 취급되거나 비능률적이고 망국적인 제도로 인식되어온 것도 사실이라는 문제점을 명확히 적시했다.
날카로운 비판이 있었지만 1991년 다시 부활한 지방자치제의 평가와 관련해서는 별다른 평가분석이 없는 실정이다. 이는 옥천군지가 94년 편찬됐고 막 시작된 지방자치를 섣불리 평가하기에는 부담이고 아직 이르다 판단해 평가한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91년 시작된 시군 자치제는 일제시대 이전 조선시대 남아있던 자치조직과도 해방이후 헌법을 만들면서 시행했던 읍면자치제의 성격과는 확연히 다르다. 오히려 일제시대의 지방자치제와 유사하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볼 때 읍면 자치는 근대화 들어 제도적으로 정착되기에 너무나 짧은 시기였고 제대로 실행조차 되지 못한채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시골 농촌, 군단위의 읍면은 정서적으로 아직도 읍면의 독자적인 생활권이 나뉘어 있고 실재적으로 많이 축소되긴 했지만 면지역 초등학교나 지역농협을 거점으로 생활권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 우리나라 제도의 지방자치는 이런 생활권, 즉 생활자치를 자꾸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제도적인 지방자치는 남아있되 주민자치가 요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너무도 큰 맞지 않는 헐거운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2)해외의 지방자치 사례 -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에는 외국의 지방자치 사례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외국 하면 뉴욕이나 파리, 런던 등 큰 도시만 알려져 있을 뿐 조그만 기초자치단체의 시스템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소개된 사례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막연히 현행의 시군단위체제도 비효율적이라 생각하고 자꾸 통합을 이야기 한다. 이는 행정서비스가 민의 욕구에 만족시키지 못하면서 예산낭비라는 인식과 함께 아예 없애는게 낫겠다는 인식이 파급된 것으로 보인다. 언론의 지방 공무원의 복지부동 질타, 자치단체장의 뇌물수수, 비리, 구속 등 연일 계속되는 보도로 인해 지방자치제의 환멸을 가져온 것도 행정구역 통합 분위기에 한 몫을 한 셈이다.
이는 옥천군지의 비판점과도 궤를 같이 한다. 첫 단추를 잘못 꿰어졌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런 해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외국의 사례는 어떨까?
대전대 행정학과 안성호 교수가 쓴 ‘정치권의 지방자치체제 개편안의 문제점과 대안적 개편 구상’(한국 거버넌스 학회보 제16권 제2호, 2009년 8월)에는 이에 대한 사례들이 잘 나와 있다.
우리나라 기초정부의 구역이 얼마나 광역적으로 설정되어 있는지 선진국의 자치구역과 비교해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다. <표1>은 우리나라 기초정부의 수, 인구, 면적을 주요 선진국 기초 정부의 수, 인구, 면적과 비교한 것이다. 남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기초정부 평균인구는 1만명을 넘지 않는다. 프랑스는 1천568명, 스위스는 2천762명, 독일은 5천452명, 미국은 6천623명, 이탈리아는 7천40명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기초정부의 평균인구 21만870명은 프랑스의 121배, 스위스의 76배, 독일의 39배, 미국의 32배, 이탈리아의 31배인 셈이다. 남유럽 국가 및 미국과 같은 선진국들에서 기초정부의 평균 인구는 고작 수천 명에 불과하다. 프랑스, 스위스, 독일, 스페인의 대다수(84-95%) 기초정부 평균인구는 우리나라 면의 평균인구인 5천명 미만이다.
북유럽 국가들은 1970년대와 1990년대 이후 기초정부의 구역을 확대한 결과 기초정부의 평균인구가 1만명 이상이다. 핀란드는 12,620명, 스웨덴은 31,240명, 덴마크는 56,127명이다. 영국은 무려 128,061명에 달한다. 일본은 대체로 북유럽국가들처럼 시정촌 통합에 열중한 결과, 기초정부의 평균인구가 6만7천여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의 기초정부 평균인구 규모는 남유럽국가들 및 미국보다 월등히 크지만, 우리나라 기초정부의 평균인구 21만명에 비하면 크게 작다.
국토면적이 좁아 조밀하게 사는 우리 나라의 기초정부의 평균 면적은 영국 다음으로 넓다. 심지어 우리나라 기초정부의 평균 면적이 광활한 국토를 갖는 미국 기초정부의 평균면적보다 1.8배나 넓다. 이처럼 우리나라 기초자치단체의 자치구역이 여느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하게 설정된 것은 1952년 시작된 읍면자치가 1961년 516 군사정부에 의해 군 자치로 전면 개편된 데다 1990년대 중반 정부의 강요에 가까운 종용으로 또 한 차례 대규모 시, 군 통합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초자치단체의 수가 1960년 1천467개에서 2009년 현재 230개로 대폭 줄었고 기초자치단체의 면적은 6.4배나 넓어졌다.
안성호 교수는 우리나라의 기초자치단체의 인구와 면적이 세계 선진국과 비교해 볼 때 무척 많고 넓다고 지적한다. 안성호 교수가 거론한 유럽과 미국, 일본의 선진국과 비교할 때 우리나라는 기초자치단체의 평균 인구가 매우 크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다. 이 학술지가 발표된 것은 2009년으로 이후 마산, 창원, 진해와 청주, 청원의 통합을 감안한다면 이 숫자는 더 늘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안성호 교수는 이런 안에 비춰 지방자치체제의 대안 구상을 밝힌다. 다음을 살펴보자.
[풀뿌리 주민자치의 이상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현행 시군구 자치구역은 너무 넓다. 이제 다시 시군 자치를 읍면자치로 전환하거나 읍면동 자치를 부활시켜 자치계층을 하나 더 늘리자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타당한 대안은 현행 시군구 자치구역의 한계를 극복하고 동네 수준의 주민자치를 활성화하기 위해 읍면동 행정계층을 주민자치적 성격을 강화한 이른바 준 자치행정계층으로 만드는 것이다. 주민이 지역사회 일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 동기를 유발하는 대면적 동네를 임파워먼트하는 동네분권 및 동네 민주주의(neighborhood democracy)의 활성화가 필요하다. 다만, 예외적으로 현행 시군구 자치구역이 불합리하게 설정되어 부득이 개편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 현행 법률에 의거하여 통합 분리의 절차를 거치도록 한다. 통합을 유도하는 인센티브 제공은 삼가야 한다.]
이런 논의가 활발해지자, 정부의 지방행정체제 개편추진위원회는 ‘읍면동 주민자치회 설치 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를 2011년 10월24일 대전광역시청 회의실에서 연다. 이 토론회 자료에는 단체자치와 주민자치를 구분하며 주민자치 활성화를 위한 방향에 대해 논의한다. 읍면동 주민자치의 대안으로 주민자치회 모형을 권한이 약한 준지방자치단체형, 권한이 강한 준지방자치단체형, 그리고 지방자치단체형 등 셋으로 나눠 제시하면서 지방자치단체형 주민자치회는 현재의 정치환경에서 채택될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우리나라 지방자치 발전을 위해 장기적으로 검토할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토론회 자료는 주민자치에 대해 근린자치라 표현하며 근린자치란 근린단위 지역들이 자율성을 가지고 집합적 의사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는 현재 각 읍면단위 설치된 주민자치센터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현 주민자치센터는 평생교육문화센터로 몇 개 강좌를 수강하는 조직으로 축소돼 운영되고 있다. 이 자료에는 근린자치가 하나의 보조적 수단이 아니라 풀뿌리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사안으로 반드시 필요하다는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다. 자료의 일부를 살펴보자.
[지방행정체제 개편 특별법 제 20조에는 ‘풀뿌리 자치의 활성화와 민주적 참여 의식 고양을 위해 읍면동에 해당 행정구역의 주민으로 구성되는 주민자치회를 둘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주민자치회 기능을 정의한 제21조에서는 주민자치회가 설치되는 경우 읍면동의 행정기능을 지방자치단체로 이양하고 일부 사무만을 주민자치회에 위임 또는 위탁할 수 있다는 방향정도를 규정하고 있을 뿐 제 20조에서 언급한 ‘풀뿌리 자치 활성화’와 민주적 참여 의식 고양’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 방향이나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실제 근린을 바라보는 선진국의 제도적 관점은 지방행정구조의 보조차원에서 새로운 근린조직을 설치하고 일부 사무와 기능을 재분배하는 식의 부수적, 단편적인 접근과는 거리가 멀다. 보다 근본적으로 대의민주제 병폐를 보완하고 추락하고 있는 정부 신뢰와 정당성을 회복하며 행정서비스의 효과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종합적 처방의 관점에서 다양한 근린단위 정책실험을 강화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 나라에 있어서 근린자치의 문제는 시,군, 구 합병 또는 통합과 같은 행정체제개편 또는 정부구조 변화에 종속되는 문제가 아니라 분권과 참여민주주의 철학에 뿌리를 둔 정부의 현대화 작업이다.--영국을 비롯한 국가 근린단위 제도 실험은 ‘근린 거버넌스’ 관점에서 전개되고 있다. 거버넌스는 공공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 시장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가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시민사회 영역에 까지 주목하고 이들 세 부문 사이의 견제와 균형, 협력을 통한 문제 해결을 강조한다. 같은 맥락에서 근린거버넌스는 과거 정부서비스의 객체로만 여겨졌던 시민사회의 대표 영역인 지역사회를 더 이상 수동의 방관자가 아닌 공공문제 해결의 주체 또는 파트너로 이끌어내기 위한 가장 유효한 공간 단위가 ‘근린’이라는 철학을 반영한다. --더불어 근린은 보다 많은 시민 참여 및 정부의 책임성을 실현할 수 있는 민주적 혁신을 위한 최적의 장소로서 뿐만 아니라 지방정부체계의 현대화를 위한 각종 제도 실험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이다. ---정책적으로 근린이 주목받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대사회의 근린은 사회적, 공간적으로 통합된 게마인샤프트적 성격은 상실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일상의 스트레스와 긴장으로부터 지속적 회복작업을 위한 장소로서 이웃과의 꾸미지 않는 일상적 접촉을 통해 느슨한 유대가 유지되는 장소로서 그리고 자신이 거기에 살고 있다는 정체성을 상징화하는 생활의 장소 또는 친밀권역으로서 유용한 초점을 제공한다. 밖으로 세계화의 원심력이 지배하고 안으로 전통적인 공동체가 해체될수록 현대적 의미의 친밀권역을 강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개인의 생존은 물론 심리적 만족감, 위기 시의 도움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둘째, 민주주의 철학에서 보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에 대해 시민들이 어느 정도 통제력을 갖는 것은 시민의 권리이자 책임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책결정과 서비스 전달에 있어서 시민의 참여를 실현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시민 참여는 주민들의 일상생활에서의 근접성과 용이한 접근 가능성때문에 근린 수준에서 가장 쉽게 실천된다.
셋째, 지역사회 공동체 형성 또는 사회적 자본 형성을 위한 최적의 공간적 단위가 바로 근린이다. 최근들어 지역사회가 강조되는 것은 단순히 산업화와 도시화로 원자화된 현대사회에서 공동체적 삶을 복원한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그러한 지역사회가 각종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의 의미에 내포되어 있는 주민들 사이의 심리적 사회적 유대는 해당 지역의 경제, 복지, 치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민들 스스로 공공재 또는 공적가치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자원으로 간주된다. 주민들 사이의 좋은 관계가 생산적 목적을 위한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측면을 잘 포착하고 있는 개념이 바로 사회적 자본이다.
넷째, 근린은 작은 지리적 단위에서 다양한 자원들이 집약적으로 사용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규모를 제공한다. 또한 근린 규모에서는 지역사회 문제 해결과 관련하여 대상 집단의 상황을 알려주는 정보에 접근하는 것이 보다 용이하며 대상 집단의 환경변화 및 새로운 정책 또는 제도의 효과를 평가하기에 유용한 규모를 제공한다.
오랜 시간을 두고 근린 거버넌스에 대한 학술적 논의와 정책실험을 진행해 온 선진국들과 비교해 볼 때 현재 우리사회에서 진행 중인 근린자치에 관한 논의는 지나치게 피상적이고 일차원적이다.]
이 토론회 자료에도 현 우리나라 지방자치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며 선진국의 사례에 비교하여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우리나라는 시군 자치구의 자치행정을 가리켜 기초자치로 일컫지만 시, 군, 자치구는 다른 나라의 기초자치단체에 비해 규모가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주민들의 일상생활을 다루는 풀뿌리 자치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나라의 시군 자치구는 주민생활의 작은 일(골목길, 동네 공원 관리, 생활체육시설 등)을 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크다. 이 같은 주민생활의 작은 일들은 시군 자치구의 자치행정에서 소흘히 되거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되며 주민의사를 반영하기가 어렵다. 주민이 거주하고 상호 교류하는 지역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 단위인 근린에서의 주민자치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주민들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자치역량을 바탕으로 자기가 속한 지역의 문제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보다는 보살핌을 받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입장에 처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풀뿌리 자치의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조선시대 면과 동리에서 주민자치가 실시되었고 1961, 516 이전에는 1천407개의 면과 85개의 읍이 풀뿌리 자치 내지 기초자치단체로 역할을 하였다. 1961년 5월 군사정부에 의해 1천592개의 읍면 자치가 140개의 군자치로 전환되면서 읍면동은 자치적 성격이 결여된 일선행정 계층에 불과하여 풀뿌리 자치가 어렵게 됐다.]
이 자료에는 행정기관형으로 우리나라와 프랑스의 지구위원회를 든다. 프랑스의 지구위원회는 사법인의 지위가 부여되고 있으며 참여민주주의와 근린자치를 강화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별로 참여헌장과 지구위원회 헌장이 채택되고 있다. 이러한 헌장은 참여민주주의와 지구위원회의 관계, 지구위원회의 역할, 권한, 구성, 임기, 개선, 집행부, 분과위원회, 회계, 결산, 평가 등에 대하여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준지방자치단체는 주민대표가 선거를 통해 선출되지만 법인격이 없고 자치행정권, 자치재정권, 자치입법권 등이 제한되고 있다. 영국의 페리쉬와 일본의 자치회가 이에 속한다는 것. 지방자치단체형으로는 지방자치단체의 지위를 부여하며 주민자치를 시행하는 프랑스, 스위스의 코뮌이 이에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