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양면성이 있다. ‘혈연, 지연, 학연’은 중첩될수록 끈끈해지고 안의 구심력은 강해지나 그 외의 존재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힘 또한 강해진다. ‘끈끈해진다'의 긍정성은 정체성의 형성에 기여하고, 어려울 때 기꺼이 도와주는 것이다.
그것은 공동체의 큰 장점이다. 하지만 옳고 그름의 원칙까지 흐려가면서 이뤄질 때 이른바 ‘제 식구 감싸기'가 된다. 선 안의 사람들은 그것을 계기로 관계가 더 공고해질 수 있겠지만, 선 밖의 사람들은 ‘분노'와 ‘환멸' 그리고 ‘혐오'의 감정까지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지적하는 일이란 쉽지 않다. 공동체가 도맷금으로 부정당했다고 느껴졌을 때 누군가는 선동을 할 터이고 하나로 응집되면 걷잡을 수 없다. 그래서 공동체의 필연적인 짝으로 ‘공공성'의 의미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끈끈함을 지킬 힘으로 ‘공공성'이란 원칙이 탑재돼야 한다.
서설이 길어졌다. 5만명 내외의 지역 농촌의 군 단위에서 지역신문 기자로 산다는 건 지연, 혈연, 학연에 실시간으로 부딪친다는 것이다. 비판 기사일수록 그렇다. 만나는 사람마다 연결되어 있다. 때론 무섭다. 비판의 대상이 된 사람의 친구 또는 가족이 바로 내 이웃이라는 건 상상이 아니라 실재다. 기사를 쓰면 굳이 권력과 자본이 아니라도 친분을 나눴던 사람한테 득달같이 전화가 올 때가 수도 없다. 인연의 힘이란 무섭다. 그렇게 펜대를 하나씩 굴절시키거나 왜곡해버리면 공공성은 휘어지고 인의 장막에 갇힌다.
그래서 공동체의 공공성을 구현할 지역언론이나 풀뿌리시민단체가 중요하다. 풀뿌리민주주의를 지키는 초석이자 보루다. 2018년 <옥천신문>에 최근 가장 뜨거운 이슈는 ‘의회 사무과 전 무기계약직 속기사가 갑질과 성희롱을 당했다'는 뉴스다. 한명이 아닌 두명 이상의 전현직 구성원이 갑질을 <옥천신문> 여론광장에 고백하고, 성희롱을 이야기했다. 익명으로 이야기했지만,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좁은 지역의 특성상 누가 얘기했는지는 공직 사회에서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용기 내 고백한 대목 중 하나는 정말 가슴이 아팠다. ‘옥천의 ‘옥' 자만 봐도 경기가 나고 정말 분노가 치민다'는 말이었다. 택시에 옥천포도축제 광고만 봐도, 옥천으로 향하는 버스만 봐도 그렇다고 했다.
그들은 지연, 혈연, 학연으로 얽힌 철저하게 위계적인 그룹에서 배제당했다고 느꼈다. ‘제가 면장 딸이었다면, 지역 유지 아들이었다면 과연 그랬을까요'라는 물음은 더 가슴이 아팠다. 만약 지역언론조차도 외면했다면 이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옥천신문>은 기사를 계속 쏟아냈다. 제보자가 올린 <옥천신문> 여론광장 게시판의 글에는 주민의 격려와 공분의 글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그리고 옥천노동자협의회에서는 함께 싸우고 연대하기 시작했다. 옥천에 공공성을 지키고자 하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증명해주고 있다.
지역신문 기자를 한다는 것은 사실 투명한 유리상자에 있는 것과 같다. 기자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들이 매주 기사를 확인하고 실시간으로 피드백을 준다. 혹시나 엉뚱하게 기사가 나가지는 않았는지 촘촘한 감시망이 존재한다. 그것이 <옥천신문>이 그나마 올곧게 나가는 힘이다. 감사권이 독립되지 않은 지자체에서, 경찰 인력도 지연, 혈연, 학연을 무시할 수 없는 지역에서 공공성을 지키는 지역언론은 단비처럼 소중하다고 감히 단언한다.
곳곳에서 공동체에 편입되지 못하고 분노와 환멸, 그리고 혐오를 마주하며 튕겨져 나가는 주민들을 실시간으로 본다. 배제의 정치, 그들만의 리그에서 공공성을 지키려면 건강한 지역언론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요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