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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Nov 14. 2021

내가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느낌

작심삼일의 아이콘 제이는 또다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었다. 자기자신이 통제되지 않는 느낌,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흘러내리듯 자기가 자기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완벽한 계획을 세워놨는데 왜 지키질 못하니! 요즘 들어 야근이 잦았던 건 사실이지만 하루에 30분도 못 낼 정도는 아니었는데. 하긴, 하루 30분으로 지킬 수 있는 계획은 아니긴 했다.


‘혹시 내가 나 자신을 너무 통제하는 건 아닐까?’


<금쪽같은 내 새끼> 애청자인 제이는 ‘계획을 세우는 자신’이 부모, ‘계획을 지키지 않는 자신’이 자식이라고 생각해보았다.


부모는 자식을 작가로 만드는 것이 지상 목표이며, 그것은 자식도 원하는 바였다. 그래서 부모는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해야 할 일들을 잘게 쪼개서 계획을 세우고, 하루 작업시간을 기록할 엑셀 양식을 만들고, 주간 마감 스케줄을 정하고, 드라마·예능·유튜브 중독에 빠지지 않도록 스마트폰 잠금시간을 설정하고, 한 시간 단위로 작업시간 알람을 맞추고, 건강한 식습관을 들이기 위해 식판을 구매했다. 자식이 기죽지 않도록 글의 퀄리티에 대해서는 일절 터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식들이 그렇듯 이 자식도 말을 듣지 않았다.


야근한 날은 어쩔 수 없었다 치고, 운좋게 일찍 퇴근한 날은 어땠느냐? 집에 오면 에어프라이어에 치킨을 데운다. 부모가 사준 식판은 설거지가 귀찮아 개시도 못했다. 저녁 시간에는 영상시청이 허용되므로 치킨을 먹으며 꼬꼬무 시즌2를 본다. 8시반이 되자 영상이 뚝 끊긴다. 하필이면 제일 궁금한 장면에서!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디지털피아노를 치다보니 9시 알람이 작업시간을 알린다. 아직 치던 곡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무시한다. 피아노도 치고 인터넷 서핑도 하며 빈둥빈둥 놀다보니 10시 알람이 울린다. 이제야 겨우 페이퍼 노트를 펴고 작업을 시작해보는데 벌써 잠이 쏟아진다. 요즘 계속 야근하느라 잠이 부족했으니 오늘은 파격적으로 일찍 자보는 게 어떨까? 예를 들면, 지금 당장.


자식의 모습을 보며 부모는 고민했다. 억지로 공부를 시키는 것도 아니고, 분명 본인이 하고 싶다는 일을 시킨 건데 왜 못 지키는 걸까? 내가 너무 비현실적인 기대와 통제를 했나? 작가가 되려면 이런 계획을 지켜야 한다는 내 생각이 과연 맞을까? 또는, 자식이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부터가 잘못된 게 아닐까?


부모가 최근 읽은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사람들을 가장 괴롭히는 과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고착된 ‘나만의 법칙과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이고 충격적인 경험’이다. …인생의 법칙은 유익할 때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특히 융통성 없거나 스스로에게 괴로움을 주는 법칙이라면 더더욱 그렇다.(오언 오케인,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들을 위한 심리책」, 갤리온)


민주적인 부모는 자식에게 물었다.


“이 계획이 너무 무리였니? 너 혹시 글쓰기보다 노는 게 더 좋은 거 아니니? 그렇다면 꼭 작가가 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너나 나나 괜히 사서 고생할 것 없이 글은 쓰고 싶을 때 취미로 쓰고 계속 직장을 다닐래?”


그 말을 듣고 자식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1. 이 계획이 무리인가? >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2. 글쓰기보다 놀고먹는 게 더 좋은가? > 모르겠음, 둘 다 좋음

3. 작가가 안 돼도 괜찮을까? > 그러기엔 쓰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음

4. 쓰고 싶은 게 많은데 왜 안 쓰고 있을까? > 나도 제발 알고 싶음

5. 사서 고생할 것 없이 글은 취미로 쓸까? > ……

6. 직장을 계속 다닐래? > 확실히 싫음


이 지점에서 자식의 마음을 찜찜하게 하는 의문은 이것이었다. ‘내가 정말로 직장을 다니기 싫다는 이유로 작가가 되려는 걸까? 내 꿈이 겨우 그것밖에 안 되나? 순수하지 못하고 절실함이 부족한가?’


한편, 말 한마디 없이 방구석에 처박혀 고뇌하는 자식을 보며 부모는 생각한다. ‘쟨 대체 뭐가 문제라서 저러는 걸까. 오은영 선생님 도와주세요ㅠㅠㅠㅠ’


*

그렇게 방황하던 어느 날, 제이는 직장 선배의 한마디에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공부든 뭐든 퇴사한 뒤에 집중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니 직장 다니는 동안은 굳이 병행하려고 무리하지 않겠다, 50에 퇴사하면 50에 시작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맞는 말이잖아……?


아등바등 기를 쓰며 하루 1시간 2시간씩 몇 달 동안 할 일을, 퇴사 후에는 통으로 집중해서 보름 만에 뚝딱 끝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박경리 선생님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자투리가 아닌 두루마리 같은 시간을 갖고 싶었다’고. 어차피 몇 년 안에 그만둘 직장, 일하는 동안은 너무 멘탈 깎아먹지 말고 마음을 더 편하게 먹기로 제이는 결심했다. 그러면서도 포기하지는 않을 자신이 생겼다.


이렇게 제이는 또 한 번의 작심삼일 사이클을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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