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 Apr 13. 2022

책장을 정리해드립니다

매일 발행 10일차

나는 도서수납정리전문가다.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했지만 도서관 취직에 끝내 실패했고, 결국 개인 책장이나 서재를 정리해주는 일을 하게 됐다. 


의뢰가 들어오면 면담을 통해 고객의 현재 관심사를 파악한다. 그에 따라 이제는 필요 없어진 책들, 어디서 강제로 떠안은 것 같은 책들, 한 번도 안 읽고 구석에 처박혀 있는 책들을 골라내 책등이 위로 가도록 줄지어 세우고 사진을 찍어 보내준다. 책 주인은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도 사진만 보면서 이 책 이 책은 살리고 나머지는 버려달라는 식으로 요청할 수 있다.


책 분류와 배치도 물론 서재 주인이 원하는 방식대로 해준다. 종류별, 저자 가나다순, 제목 가나다순으로 분류해주기도 하고, 전공을 살려서 한국십진분류법에 따라 스티커를 붙여주기도 한다. 그밖에 색깔 그라데이션을 맞춰 달라든가 ‘공부용 책과 기분전환용 책’을 구분해 달라는 따위의 개인적인 요구도 다 반영해 준다.


오늘 방문한 서재는 대략 4000권 규모다. 이제는 딱 둘러보기만 해도 몇 권 수준인지 알아챌 수 있다. 책장 밖으로 책들이 흘러넘쳐 무너진 탑처럼 쌓여 있었다. 부동산, 주식투자, 기업경영 류의 책들이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문학이나 인문학 종류의 책들은 빛바랜 90년대 책들이 대부분이다. 청년 시절에는 읽었지만 지금은 노관심이란 뜻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책을 다 꽂으려면 책장이 얼마나 더 필요한지 가늠해보았다. 폭 90센티짜리 5단 책장이 최소 여섯 개는 더 필요할 것 같다. 3면이 책장으로 둘러 있는 서재이니, 출입문이 있는 나머지 한 면에도 책장을 들이고, 도서관처럼 방 가운데에도 책장을 배치해야 한다.


이렇게 남의 서재에서 혼자 견적을 보는 시간이 좋다. 무념무상으로 몰입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 누군가가 평생 쌓아둔 관심사 리스트를 마음껏 구경하고, 몰랐던 책들을 발견하고, 혼자 음악을 들으며 목장갑을 끼고 책들을 착착 빼냈다가 다시 착착 꽂아 넣는 모든 과정이 적성에 딱 맞는다.


다만 걱정은 한차례 일이 끝나면 수입의 20% 이상이 책값으로 나간다는 점이다. 새 서재를 구경할 때마다 사고 싶은 책들이 얼마나 늘어나는지, 남의 서재를 정리해주는 일을 하면서도 정작 내 방은 책이 흘러넘쳐 터질 지경이 되어버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말없는 백일장, 4월 23일(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