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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Apr 17. 2022

필기구 특별 콜렉션

매일 발행 15일차

제이는 동네 문구점 필기구 코너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쓰던 소설이 잘 풀리지 않아 손글씨로 한번 써보면 어떨까 하고 새 펜을 사러 왔는데, 어떤 펜이 좋을지 결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건 필기감이 너무 미끈거려서, 이건 너무 뻑뻑해서, 이건 색깔이 별로라, 이건 심이 금방 빠질 것 같아서, 이건 너무 가늘어서, 이건 너무 굵어서, 이건 잘 번질 것 같아서, 이건 다이어리 뒷장에 비치기 쉬울 것 같아서, 이건 너무 비싸 마음대로 못 쓸 것 같아서 등등의 이유로 제이는 한참을 망설였다.


온갖 펜이 빽빽하게 꽂힌 진열대에는 시필용지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너댓 뼘쯤 되는 길쭉한 종이는 형형색색 낙서로 가득 차 지저분했다. 종이를 아끼기 위해, 또는 문구점 사장의 무관심 때문에 한참이나 방치된 모양이었다. 제이는 얼마 안 되는 여백을 찾아 이 펜 저 펜을 끄적여 보다가, 낙서들 속에 묻힌 그 문구를 발견했다.


'필기구 특별 콜렉션, 카운터 문의'


조그만 연필 글씨는 다른 낙서들에 가려져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제이는 기어코 읽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게 뭐지? 누가 장난으로 쓴 낙서 같았지만 제이는 밑져야 본전인 셈치고 카운터로 갔다. 머리를 보글보글 볶고 형광초록색 누비조끼를 입은 사장은 권태로운 자세로 캔디크러쉬 게임에 여념이 없었다.


"저 혹시, 저기 써 있는 특별... 어쩌구라고 아세요?"

"아아!"


주인이 기다렸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으며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봤어요? 아이고 반갑네. 그거 찾는 사람 오랜만인데."

"그야 저런 데다 안 보이게 써 놓으시니까..."

"아무나 보여주면 닳아."


사장은 카운터를 나와 성큼성큼 필기구 코너 쪽으로 가더니 진열대 하단장을 열쇠로 열고 파란 벨벳 상자 한 개를 꺼냈다. 선물용 참치세트처럼 납작하고 넓은 모양이었다. 사장은 '어이차' 하며 상자를 들고 카운터로 돌아가며 제이에게 눈짓을 했다.


"이거 보려면 한참 걸려. 들어가서 앉아봐요."

"카운터에요? 제가요?"

"들어오라니까."


카운터 안에는 수납장을 겸하는 긴의자가 있었고, 도시락과 장부, 스카치테이프 등등이 널린 작은 탁자도 있었다. 사장이 탁자의 잡동사니를 재빨리 치우고는 상자를 올려놓았다. 제이는 긴의자에 뻘쭘하게 엉덩이를 내려놓고 홀린 듯이 보고만 있었다.


첫 번째 상자 뚜껑을 열자 이십여 개의 가지각색 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급 만년필에나 어울릴 융 받침대에 나란히 놓인 펜들은, 뜻밖에도 평범한 볼펜, 수성펜, 연필 따위였다. 각각의 펜 아래에는 번호를 매긴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애걔?"

"그냥 봐선 모르겠지? 설명서를 봐야 된다고."


사장은 상자 구석에 끼워져 있는 종이를 꺼내 제이에게 건네주었다. 마침 딸랑딸랑 소리와 함께 손님이 들어와 사장에게 8절지 도화지 위치를 묻는 동안, 제이는 설명서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실용형]

1. 마르지 않는 수성펜: 영원히 잉크가 떨어지지 않는다.

2. 자 펜: 자 없이도 정확히 원하는 길이의 직선을 그릴 수 있다.

3. 표 펜: 자 없이도 정확히 원하는 크기와 간격의 표를 그릴 수 있다.

4. 컴퍼스 펜: 컴퍼스가 없어도 원하는 크기의 정확한 원을 그릴 수 있다.

5. 컴퓨터 사인펜: 이 펜으로 계산을 하면 절대 틀리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그냥 신기하긴 하지만 컴퓨터나 태블릿을 쓰면 될 일 아닌가 싶은 정도였다. 그런데 그 아래로는 점점 더 허무맹랑한 내용이 되어갔다.


[활용형]

※ 주의사항 엄수

9. 극B연필: 감추고 싶은 일을 이 연필로 쓰고 태우면 영원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다. (주의! 진심으로 들키기 싫은지, 내심 들키고 싶기도 한지 신중히 생각할 것)

10. 빨간구두 만년필: 일단 글의 제목을 적으면 끝맺을 때까지 멈춰지지 않는다. (주의! 시간이 많을 때 시작할 것, 끝내는 데 평균 12시간 소요)

14. 기화 방지 펜: 꼭 기억해야 할 내용을 이 펜으로 쓰면 절대 잊히지 않는다. (주의! 틀리게 쓰면 틀린 대로 외워짐, 수정 불가)

17. 진심 붓펜: 이 붓펜으로 편지를 쓰면 누구에게든 내 마음을 오해 없이 전달할 수 있다. (주의! 펜 하나당 단 한 사람에게만 쓸 수 있음)

18. 드립볼펜: 누구나 빵 터지는 웃긴 드립을 잉크가 닳을 때까지 쓸 수 있다. (주의! 잉크가 닳으면 다시 재미없는 캐릭터로 돌아갈 수 있음)

21. 무엇을고를까요펜: 고민되는 두 선택지를 나란히 적고 펜을 좌우로 흔들어보면 더 나은 결정을 짚어준다. (주의! 더 나은 선택을 하더라도 본인 하기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음)

23. 신데렐라 펜: 매일 정해진 시각에 저절로 손에 펜이 쥐어져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쓰게 된다. 마르지 않는 수성펜 상위호환 버전. (주의! 그 시각에 어떤 돌발상황이 생겨도 예외 없으므로, 시간대 선택에 유의할 것)

25. 1000원짜리 펜: 1000이라는 숫자를 한 번 쓸 때마다 현금 1000원이 생긴다. (주의! 잉크 분량 2000만원 한도)

26. 결정 수정펜: 과거 자신이 선택한 결정 하나를 바꿀 수 있다. (나비효과 주의, 17자 넘게 작성 불가능)


한참을 구경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저녁 무렵이었다. 어느새 카운터로 돌아와 모바일 고스톱에 빠져 있던 사장이 제이를 돌아보았다.


"어때, 뭐 갖고 싶은 거 있어요?"

"이거 다 뻥이죠?"

"믿든가 말든가. 난 실제로 써봤으니까."

"뭘 써보셨는데요?"

"극비연필도 써보고, 빨간구두도 써보고, 신데렐라도 써봤지. 자 펜이니 표 펜이니 이런 것도 애들 장난감 같지만 나름 유용하고. 마르지 않는 수성펜은 지금도 쓰잖아. 한번 써볼래요?"


사장은 상자에 있는 1번펜과 똑같이 생긴 펜을 연필꽂이에서 꺼내 건네주었다. 카운터에 있는 메모지에 끄적끄적 시필을 해보았지만 이게 진짜 영원히 마르지 않을지는 알 수 없었다. 설명서 속 내용이 진짜든 아니든, 사장은 재미있는 사람 같았다.


"이런 게 다 진짜면 문구점 안 해도 되지 않아요? 1000원짜리 펜 이런 거 대박인데."

"천원짜리 펜 가격이 1800만원에 부가세 별도거든. 1000을 2만 번 쓰는 데 8시간 넘게 걸리는 거 알아요? 하루종일 1000만 계속 쓰고 있어봐. 팔 떨어져, 머리 나빠져, 못할 짓이지 그게. 한두 번 해보고 집어치웠지."


제이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나저나 시간이 늦었는데 어쩌나. 갖고 싶은 거 있음 집에 가서 생각해봐요. 나는 밤 9시가 신데렐라 시간이라 빨리 셔터 내려야 되거든."

"우와, 진짜 밤 9시마다 2시간씩 평생 쓰실 거예요?"

"저중에서 제일 유용한 게 그거더라고, 내 취향이지만."


제이는 결국 평범한 중성펜 하나를 사서 집에 돌아갔다. 빨간구두 만년필로 12시간 쓰기에 도전한다면 내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신데렐라 펜을 산다면 몇 시에 쓰기로 정하면 좋을까, 쓸데없이 골똘히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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