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발행 21일차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아무도 안 올 확률 100%'라는 가능성이 현실이 되었다. 허허허 인생 뭐 있나? 백일장을 계획했던 토요일 오전 두 시간이 과연 어땠는지 기록해보려 한다.
전전날: 미리 공원에 가서 어디쯤에 앉을지 자리를 봐두었다. 사진도 찍어서 공지글에 추가했다.
전날: 아무것도 새로 사지 말고 집에 있는 것만으로 준비하기로 했다. 안내문과 원고양식을 만들어 프린트하고, 연필을 깎고(집에 연필깎이가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칼로 하나하나 깎음), 기념품과 읽을 책 등 준비물을 챙겼다.
당일 9시 20분경: 집에서 출발. 짐이 다 들어가는 크기의 가벼운 가방이 다이소 경량백팩뿐이었는데 실제로 메 보니 색깔이 너무나도 당혹스러웠다. 안 그래도 부끄러운데ㅋ
9시 40분경: 북마켓 테이블 차리던 바이브로 벤치 위에 준비물들을 착착 꺼내 깔아놨다.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최대한 주위를 둘러보지 않으려 했다. 부끄러우니까...-_- 그러면서 생각했다. 나는 정말 주목받기 싫어하는 성격인데 도대체 왜 가끔 이런 일을 벌이게 되는 걸까?
10시경: 등 뒤 산책로에서 갑자기 "싹 다~ 갈아엎어 주세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사랑의 재개발>을 목청 높여 부르며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 후로 이 노래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10시 20분경: 슬슬 궁금해졌다. 정말로 아무도 안 올까? 두 시간 후의 미래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심심할 겨를이 없어 보였다. 등산복을 입고 온 장년층, 가족끼리 온 나들이객들, 벤치 위에 누워 낮잠을 자는 사람 등등 모두들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11시 전후: 숲해설사 선생님이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뭔가 재미난 것들을 보여주었다. 아이들이 재잘대고 깔깔대는 소리가 좋았다. 그밖에도 새소리며 말소리며 각종 천연 백색소음이 공원 분위기를 활기차면서도 평화롭게 만들었다. 가끔씩 다인승 사륜자전거 바퀴 굴러가는 소리도 들렸다.
12시 20분: 책을 읽다보니 어느새 12시가 지나 있었다. 사랑의 재개발이 머릿속 bgm으로 깔려버린 것만 제외하면 책이 정말 술술 읽혔다! 짐송의 『이것도 책인가요?』를 다 읽고, 곽재식의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을 반쯤 읽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배가 고파왔다. 벤치에 차려놓은 물건들을 다시 착착 가방에 챙겨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 얘기는 다음에 따로 하는 걸로.
그리하여 오늘의 백일장 최종 결산은?
딱히?
[얻은 것]
1. 이면지 수십 장
2. 깎아놓은 연필들
3. 오늘의 브런치 글감
4. 재밌는 책 1.5권 읽음
5. 봄바람과 봄 경치를 즐김
6. 천하의 소심쟁이가 모처럼 약간의 용기를 발휘해봄
7. 몇 년이 흘러도 '음, 그때 내가 별걸 다 해봤지' 하고 떠올릴 기억
마지막으로, 공개되지 못한 오늘의 백일장 주제는?
1. 내게 100일간의 휴가가 생긴다면
2. 자유주제
(택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