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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Apr 30. 2022

나는 나를 정말 모른다, 에니어그램

매일 발행 27일차

제이는 본인이 굉장히 얌전하고 성실하고 수동적인 범생이인 줄 알고 살아왔다. 낯 가리고, 혼자 조용히 놀기 좋아하고, 남에게 절대 화내지 않고 남의 의견을 따르며, 맡은 일은 실수하지 않도록 열심히 하고, 루틴과 계획을 세워 지키려고 노력하는 등등의 모습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살다보니 자기자신이 이해가 안 될 때가 너무 많았다. 내가 지금 왜 이러는 걸까? 나는 왜 이런 식으로 말하고 행동할까? 나에게는 왜 이런 게 특히 어려울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뭘까?


그러던 어느 날 제이는 에니어그램 상담 카페에 가보기로 했다.


에니어그램은 MBTI보다 훨씬 오래된 성격유형론이다.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사람의 성격을 크게 9가지로 나누고, 각 유형의 자기인식과 성장을 돕는다. 작가들이 작품 속 캐릭터를 구상하는 데 활용하기도 한다.


제이는 본인이 5번*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책을 보고 혼자 짐작했을 뿐 실제로 검사나 상담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자기 성격'이라는 엄청나게 흥미로운 주제에 대해 심도 있는 얘기를 해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오랜만에 신이 났다.

* 모르는 것을 두려워해 지식을 축적·탐구하는 유형




'별별성격카페'는 커다란 화분과 책장으로 편안하게 꾸며진 공원뷰 북카페였다. 검사지를 받아보니 '내가 생각하는 나', '남들이 말하는 나' 두 파트로 유형별 단어들을 나열해놓고, 체크한 단어의 갯수를 세어 순위를 매기는 방식이었다. 막상 체크를 해보니 이게 웬일? 의외로 9번*이 1순위가 나오는 게 아닌가?

* 갈등을 두려워해 조화와 평화를 추구하는 유형

대망의 상담시간! 에니어그램을 15년쯤 공부하고 4000명을 상담해봤다는 선생님은 맨 먼저, 사람은 자기에 대해서 정말 모른다는 말로 상담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과 같이 오는 게 성격을 파악하는 데 더 유리하다고 했지만 철벽 아웃사이더 제이가 이런 데 같이 올 사람이 있을 리가...ㅎ 다음으로 각 유형에 대한 소개가 이어졌다.


별별성격카페 유형 도표(사진 왜이럼;;;;;;;)


생각보다 설문지의 비중은 크지 않았다. 글씨체나 걸음걸이, 말투, 옷차림, 상담 내용, 각 유형을 설명할 때 보이는 반응, 그밖에 제이가 알 수 없는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보시는 듯했다. 그런데 한참 얘기할 때까지도 5번과 9번 중에 딱히 이거다 싶은 게 없었다.


혹시 투자 같은 건 안 하세요?

투자요??? 아아뇨.

왜일까요?

신경쓰기 싫어서요. 하고 싶은 걸 해야 되니까 관심 없는 건 절대 안 해요.

집에서 있을 때는 뭘 해요?

뭐... 글도 쓰고 책도 읽고 피아노도 치고 영화도 보고 이것저것...

좀 산만한 면은 없어요?

산만... 글쎄요...? 산만한가...? 그래도 어릴 때 공부는 좀 했었...

공부랑은 또 다른 얘기고. 좀 덜렁댄다거나.

덜렁대기는 해요. 어렸을 땐 막 춤추고 돌아다니고 그랬다더라고요.

7번*... 같기도 한데......?

느에에에에에에에에에???????????????????? 그... 그럴 리가...........!!!

7번인데 사회적으로 얌전하게 누르는 문화 때문에 이렇게 됐을 수도 있어요.

* 고통을 두려워해 즐거움과 만족을 추구하는 유형


제이가 생각하는 7번은 파티피플 같은 외향성의 끝판왕 이미지였다. 그리고 제이는 그 대척점에 있는 내향성의 끝판왕이었다.


7번 유형은 ...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재미있는 것에 대해 어린아이와 같은 기대로 가득 차 있으며 호기심과 낙천주의, 모험심을 가지고 삶에 접근한다. 이들의 마음은 하나의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재빨리 움직여 간다. 항상 아이디어가 넘치고 즉흥적이며 한 가지 주제에 대해 깊이 연구하기보다는 무엇을 만들어 내는 초기 단계에서 개괄적으로 살펴보는 것을 좋아한다.(돈 리처드 리소 외, 『에니어그램의 지혜』, 345쪽)


믿기지가 않았지만 혹시 7번일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지난 삶을 돌아보니 ‘그래서 그랬나?!’ 하고 주마등이 스치듯 촤라락 떠오르는 부분들이 있었다.


야심차게 장편을 시작하고 매번 끝맺지 못했던 것. 일할 때 여기 깔짝 저기 깔짝 왔다 갔다 하며 일했던 것. 대화할 때 뜬금없이 ‘우와 근데 저 꽃 짱예쁘다’ 이런 식으로 관심이 튀었던 것. 한 직장을 3년 넘게 다녀본 적이 없고, 이직을 할 때는 직종 자체를 바꾸곤 했으며, 새 직업을 선택할 때는 ‘재밌어 보이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했던 것.


무한히 자유를 추구하고 간섭받기 싫어하는 것. 단조롭게 사는 듯 보이지만 하고 싶은 건 다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 삘받으면 갑자기 수학 문제집을 사다 풀거나, 호기롭게 영어 원서를 사서 몇 장 읽어보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새로운 식재료를 사놓고는 금세 잊어버렸던 것.


나이를 먹어도 어린애처럼 세상에 신기한 게 너무 많았던 것. 재밌거나 놀랍거나 신기할 때 우와! 헐! 대박! 진짜? 식으로 리액션이 엄청 크고 과장돼서 ‘난 왜 이렇게 오바쌈바를 떠는 걸까’ 싶었던 것. 책을 읽을 때면 웃기거나 흥미로운 부분에 주로 밑줄을 긋고 메모를 했던 것. 심지어 글을 쓸 때 ‘정말, 너무, 전혀, 완전, 엄청’ 같은 강조 부사를 자주 넣었던 것까지도.


그러니까 제이는 노는 게 제일 좋은 뽀로로 같은 존재였던 걸까? 세상 모든 재밌는 건 다 해보고 싶은데도 어쩔 수 없이 범생이로 살아왔던 걸까?


자기 자신을 파악한다는 게 이렇게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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