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 Apr 29. 2022

고민없이 선택할 자유

매일 발행 26일차

황무일 씨가 대형마트에 간다. 입구로 들어서자 천국만큼이나 휘황하고 쾌적하다. 카트를 몰고 거침없이 누비며 이것저것 마음대로 담는다. 마른오징어, 국화주, 막걸리, 냉동족발, 장어구이, 한우 부채살, 아나고회, 닭강정, 사과, 속옷, 베개, 냄비, 형광등, 락스, 모나카, 단팥빵 등등등 카트가 차고 넘치도록.


아슬아슬하게 얹혀 있던 막걸리병이 굴러떨어진다. 퍽 소리가 나며 초록색 플라스틱 병 속에서 부글부글 거품이 끓는다. 병을 주워 진열대에 올려놓고, 새 막걸리를 카트에 얹는다. 이렇게 엄청난 카트를 밀고 다니니 시식코너 직원 앞에서도 당당하다. 바구니도 없이 이쑤시개 하나 들고 식품코너를 배회하는 사람과는 대접이 다르다.


즐거운 시간은 길지 않다. 황무일 씨는 샴푸 코너와 세제 코너 사이에 카트를 놔둔 채 물건을 고르는 척 조금씩 멀어지다가, 몰래 잽싸게 빠져나온다. 누가 쫓아올세라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마트에서 멀어져간다. 카트 대여료 100원을 냈으니 공짜로 즐긴 건 아니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저 카트 언제부터 저기 있었어?” 주인 없는 카트를 뒤늦게 발견한 직원들이 황당해 한다. 포장된 상품은 그나마 제자리에 진열하면 되지만, 손질해서 봉지에 담은 생선은 처리하기가 난감하다. 보안직원들이 CCTV에서 황무일 씨의 인상착의를 확인하고 요주의인물 리스트에 올린다.


동네로 돌아온 황무일 씨는 굽이굽이 좁은 골목을 한참이나 올라가 집 근처 슈퍼에 들어선다. 주머니에서 잔돈을 주섬주섬 꺼내 새우깡과 소주를 산다. 마트에서의 화려한 쇼핑이 마치 전생에 있었던 일처럼 느껴진다. 뭔가를 그렇게 고민없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사치를 언제 다시 누려볼 수 있을까? 반지하 쪽방에 돌아가 텔레비전을 켠다. 채널을 돌리고 또 돌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놀라운 신문물을 접하였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