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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May 02. 2022

하늘멍, 백혈구멍

매일 발행 29일차

불멍, 숲멍, 구름멍, 하늘멍... 뭔가를 멍하니 바라보며 머리를 비우는 '멍때리기'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가끔은 백혈구를 바라보며 멍때리는 것도 괜찮다.


맑은 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면 아주 작고 하얀 빛점들이 물속에 가득한 올챙이처럼 빠르게 헤엄치는 모습이 보인다. 낮에 보이는 반딧불이 같기도 하고, 춤추는 별들 같기도 하다. 이게 바로 눈알 속 혈관을 타고 움직이는 백혈구의 모습이라는 사실!


눈은 앞뒤가 뒤집혀 있는 엉성한 구조이다. 혈관과 신경섬유 같은 것들이 빛을 감지하는 세포들의 앞쪽으로 흩어져 있기 때문에, 눈은 그것들을 뚫고서 내다보아야 한다. 보통은 뇌가 모든 간섭을 편집하여 제거하지만,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백혈구는 적혈구에 비해서 크기 때문에 때로 좁은 모세혈관에서는 꽉 끼어서 잠깐 멈칫하기도 하는데, 바로 그럴 때 눈에 보이게 된다. (빌 브라이슨, 『바디 우리 몸 안내서』, 117~118쪽)


이 책에 실린 신기한 사실들은 이뿐만이 아니다. 제이가 책을 완독했을 때는 제 몸이 살아서 움직인다는 자체가 너무 기적적이고 우주적으로 느껴져서 가슴이 다 벅찼을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고 책 내용의 대부분은 잊어버렸지만, 파란 하늘에서 백혈구가 보인다는 사실만은 왠지 잊히지가 않았다.


제이가 오늘 공원에 들고 간 책은 김영하의 시칠리아 여행기 『오래 준비해온 대답』이었다. 그런데 작가가 시칠리아로 떠나기도 전인 도입부 37쪽까지 읽는 동안에도 '와, 김영하도 아티스트 웨이를 감명깊게 읽었군!', '와, 그러고 보면 나는 예술학교에 들어갔어도 적응을 못했겠어', '와, 내 안의 어린 예술가는 뭐하고 있는 거니', '와, 나도 이런 식으로 책을 정리해봐야겠다', '와, 나도 해외에서 1년 살기 같은 거 해보고 싶다' 등등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라 집중이 되지 않았다. 책을 덮고 고개를 들어 반짝이는 백혈구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제이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해봐야겠다' '해보고 싶다' '써봐야겠다' '써보고 싶다'라는 생각들을 떠올리고 잊어버렸을까? 반짝 하고 사라진 그 작은 의욕들이 마치 파란 하늘의 백혈구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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