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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May 06. 2022

책상 위의 물건들 2_ 박경리 선생을 추억하며

매일 발행 34일차

5월 5일, 어제는 고 박경리 선생의 14주기였다.


14년 전, 2008년에도 제이는 작가지망생이었다. 언젠가 데뷔를 하면 토지문화관 창작실에 들어가, 선생이 직접 만들어주신다는 반찬을 먹어보는 게 평생의 로망이었다. 그러던 어느 봄날 갑자기 별세 기사를 접한 것이다. 제이는 아무 연고가 없음에도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문상을 다녀왔다.


제이가 『토지』를 처음 읽은 건 창문도 없는 고시원에 살던 대학 시절 여름방학이었는데, 그 방에 틀어박혀 여드레 만에 완독했다. 다 읽었을 땐 또다른 인생을 살고 나온 듯 멍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800여 명의 등장인물들은 진짜로 각자의 삶과 철학과 드라마가 있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고, 26년 동안 이 소설에 전념했다는 작가는 그야말로 한 세계를 창조한 엄청난 분이라고 생각했다. 이 작품을 모국어로 읽을 수 있어서, 모든 사투리와 어감을 이해할 수 있어서 한국에 태어난 게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이후에도 몇 번을 읽었고, 언젠가 나이 들어 병상에 눕게 되면 또다시 정독할 것 같다.


이런 대작을 쓰신 것 말고도, 토지문화관을 지어 작가들이 창작에 전념할 수 있게 하신 것, 직접 텃밭을 일궈 작가들에게 반찬까지 만들어주신 것, 그러면서도 여기서 글만 쓸 필요 없다며 잘 먹고 잘 쉬고 가라고 하셨다는 것, 토지 완결 이후 생명과 환경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셨던 것, 유고시집 제목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까지 삶의 행보 하나하나가 너무나 멋지시다.


그해 가을에는 통영으로 혼자 여행을 가서 선생의 묘소에 들렀다. 지금은 번듯한 기념관이 들어서 있지만 그때는 바다가 보이는 산자락에 고즈넉한 묘소뿐이었고 사람도 없었다. 그때 제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말 존경하고 감사한다든가, 언젠가 작가가 되면 다시 찾아뵙겠다거나 그런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얼마간 그렇게 서성대는데 사람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의 가족과 지인들이 성묘를 오신 것이었다. 갑자기 낯선 어르신들을 뵈니 너무 어색했지만 무슨 생각이었는지 자리를 떠나진 않았는데, 선생의 따님이 제이에게 원주 집 마당에서 딴 거라며 감과 대추를 나눠주셨다. 얼마나 놀랍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먹고 남은 감과 대추 씨앗은 잘 씻어서 서울로 가져왔고, 작은 유리병에 넣어 지금까지도 책상에 모셔두고 있다. 그러고 보면 제이는 창작실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선생이 기르신 무언가를 먹어보긴 한 것이다.


이 정도 에피소드가 있는 사람이면 지금쯤은 그럴듯한 후배 작가가 되어 있어야 말이 될 것 같은데 아직도 지망생이라니 헛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제이가 그렇게 생겨먹은 것을...


씨앗 유리병과 『토지』 필사 노트(소설 첫 장과 제2부 주갑-홍이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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