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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May 24. 2022

인생 뒤풀이 1

매일 발행 51일차

정신이 들자, 주위가 시끌시끌했다. 흰 옷을 입은 사람 수십 명이 넓은 강당 안에 모여 있었다. 대부분 노인이었는데, 쭈그리고 앉아 우는 사람, 팔짱을 끼고 서서 눈을 꿈벅꿈벅하는 사람, 무리를 지어 잡담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붙임성 없는 제이는 구석에 있는 접이식 철제의자에 앉아, 사람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승이 진짜 있네 그래."

"천당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고, 애매허네 그냥."

"천당이나 지옥은 심사 같은 걸 해서 보내겠죠. 일단 여기 모아놓고."

"지옥이라니, 살아서도 맨 고생만 했는데 죽어서도 지옥은 안 될 말이지."

"아니 근데 언제까지 여기다 세워두는겨. 여긴 뭐 담당자도 없나? 저승사자라도 있어야 뭘 물어보지."


그때 강당 무대 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삽시간에 장내가 조용해지고,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들어선 사람은 검정 반팔티에 검정 캡모자를 쓰고 명찰을 목에 건 청년이었다. 그가 무대에 올라 손뼉을 짝짝 쳤다.


"자, 선생님들, 여기 좀 봐주세요. 다들 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고요. 바깥에 지금 뒤풀이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한 줄로 서서, 질서 있게, 저 따라 나가시죠. 먼저 가신다고 좋은 거 없으니까요, 천천히 이동해주세요."


제이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생전 처음 보는 어르신들과 한자리에 모여 뒤풀이를 해야 하다니, 안 그래도 방금 죽어서 심란한 사람한테 너무하는 거 아닌가? 사후세계조차도 인싸를 위한 곳이었단 말인가?


제이도 젊었을 땐 친구들과 어울려 시험 뒤풀이, 엠티 뒤풀이, 연습 뒤풀이, 공연 뒤풀이, 축제 뒤풀이, 종강 뒤풀이 등등 온갖 명분의 뒤풀이를 즐겼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졸업과 취직과 결혼 등등으로 모두들 뿔뿔이 흩어지고, 뒤풀이가 사라진 자리를 직장 단체회식이 대체하면서 사람 많은 술자리라면 질색하게 된 지 오래였다.


머뭇거리는 제이의 어깨를 누군가가 툭툭 쳤다. 돌아보니 제이보다도 대여섯 살이나 어려 보이는 단발머리 여자였다. 이 사람은 어쩌다 이런 젊은 나이에 죽었을까? 궁금해할 새도 없이 상대는 해맑은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안 가시게요?"

"...가야 되면 가는 건데, 이런 거 별로 좋아하진 않아서..."

"에이, 딴 것도 아니고 인생이 끝났는데 뒤풀이는 가야죠. 뭐 맛있는 거라도 줄지 모르잖아요. 와, 난 죽으면 다시는 떡볶이도 못 먹는 줄 알았는데. 저승 메뉴는 어떨지 궁금하지 않아요?"


또래를 만나자 그래도 조금 안심이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저승 메뉴가 어떨지, 저승의 뒤풀이 자리는 대체 어떤 분위기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제이는 단발머리와 함께 거의 맨 마지막으로 강당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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