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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May 28. 2022

굴튀김에 대해서 쓰기

매일 발행 55일차

원고지 4매 이내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그렇다면 굴튀김에 관해 써보시는 건 어떨까요. 당신이 굴튀김에 관한 글을 쓰면, 당신과 굴튀김의 상관관계나 거리감이 자동적으로 표현되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끝까지 파고들면 당신 자신에 관해 쓰는 일이기도 합니다.(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23쪽)


늘 그렇듯 오늘은 뭘 쓸까 고민하던 중, 10년 전에 읽은 이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하루키의 굴튀김 이론.


나는 점 같은 존재다. 이 점 안에도 겨자씨 속 우주만큼 많은 것들이 들어 있지만, 점 하나에만 집중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작고 까만 점 하나만 파고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이 점 바깥의 어떤 사물을, 굴튀김 같은 것을 바라본다면 나와 굴튀김 사이에 선이 그어진다. 관계가 맺어진 것이다. 나와 굴튀김 사이의 거리와 방향은 고유하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굴튀김과 나 같은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내가 굴튀김에 대해서 쓰면, 내가 어떤 사람이고 남들과는 어떻게 다른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글의 소재가 뭐든 상관이 없는 게 아닐까? 나와 아주 가까운 사물이든, 나와 아주아주 멀리 떨어진 사물이든, 그 관계를 통해 결국은 내가 표현될 테니.


극단적으로 말하면 100일 동안 100가지 과일에 대해서만 써도 상관이 없고, 냉장고라는 주제만으로 100일 동안 글을 쓰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거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매일 새로운 글감을 발굴해내야 한다고 믿었던 걸까? 그러라고 강요한 사람도 없고, 그렇게 여기저기 찔러보며 찾아다니는 게 꼭 좋으란 법도 없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쓸데없는 믿음들을 찾아내기가 이렇게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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