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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May 29. 2022

인생 뒤풀이 2

매일 발행 56일차

인생 뒤풀이 1


강당을 나서니 '와' 하고 절로 탄성이 나오는 경치가 펼쳐져 있었다. 초록 나무가 무성한 가운데 계곡을 따라 평상들이 줄지어 있고, 평상마다 떡 벌어지게 차린 교자상이 놓여 있었다. 닭백숙, 해물파전, 메밀묵, 막국수... 등산 뒤풀이 그 자체인 풍경이었다. 흰 옷 입은 노인들이 계곡 평상에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신선 세계 같았다.


"이거 너무 K-사후세계 아니에요? 저승에도 국경이 있나?"


단발머리가 내게 방석을 밀어주며 키득거렸다. 나는 자동적으로 수저통을 열어 단발머리의 자리에 놔주었다. 평상 하나에 6인이 앉게 되어 있었는데, 둘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머리가 하얀 노인들이었다. 젓가락을 들기가 무섭게 맞은편 할머니의 질문폭격이 시작되었다.


"아니 세상에, 젊은 사람들이 어쩌다가 벌써 왔댜?"

"뭐, 살 만큼 살았어요."


단발머리의 시큰둥한 대꾸에 할머니는 멈칫했지만, 질문을 멈추지는 않았다.


"어디가 아팠남?"

"아픈 데 없는 사람이 있나요."

"애기들은 어쩌고?"

"애들 없는데요."

"시집은?"


듣다 못한 내가 재빨리 사회인 가면을 쓰고 끼어들었다.


"아하하, 각자 사정이 있는 거죠. 어르신은요? 자제분들 있으세요?"

"우리 애들이야, 진작 출가해서 자식 낳고 살지. 내 장례식은 다들 왔는지 모르겄네. 아 우리 큰놈이 00은행을 다니는데 어찌나 바쁜지..."

"우와, 00은행이요? 대단하시다아."


그 뒤로는 어르신들의 지난 인생 수다 타임이 펼쳐졌고, 나와 단발머리는 영혼 없는 리액션을 가끔씩 던지며 그럭저럭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노인들은 이야기에 여념이 없는 와중에도 '딸 같아서 그런다'며 우리에게 닭다리며 파전 따위를 밀어주었다. 불편하긴 해도 그럭저럭 훈훈한 술자리였다.


"아, 여기 술은 없나?"


위쪽 평상에서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술 한잔 안 마시고도 이미 취한 듯한 목소리였다.


"내 말이. 닭백숙에 술이 없는 게 말이 되나?"

"여기 막걸리 한잔 합시다."


급기야는 수십 명이 숟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막걸리, 막걸리, 막걸리, 막걸리' 장단을 맞추기에 이르렀다. 잠시 후, 아까 안내방송을 했던 검은 모자 청년이 다시 나타났다. 삐익- 삑 찢어지는 마이크 잡음에 이어 청년의 목소리가 계곡에 울려퍼졌다.


"아, 아, 지금부터 안내드립니다. 술은 계곡물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양동이랑 잔은 준비돼 있으니까 떠서 드시면 되고요."


말없이 닭을 뜯던 나와 단발머리조차 눈을 둥그렇게 뜨고 청년을 쳐다보았다. 여기저기서 들썩들썩 술렁술렁 소란이 일어났다. 대각선 방향에 앉은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나더니 양 손으로 계곡물을 퍼서 후루룩 소리를 내며 마셨다.


"이야, 이게 진짜 술이네! 이야, 역시 저승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 이야, 이거 기가 막히네!"


나도 컵 속의 물을 원샷하고 계곡물을 한잔 떠보았다. 무색무취. 아무리 봐도 물처럼 보이는데 한모금 마셔보니 최소 20도는 될 듯한 술이 맞았다. 최고급 전통소주가 이런 맛일까 싶었다.


다들 한껏 흥이 올라 떠들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노래를 부르고 어깨춤을 추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대각선 할아버지가 젊은 사람들 노래 한 곡 해보라며 숟가락을 건네고, 한소리 하려는 단발머리를 내가 말리고, 멀리서 누군가가 "뭐 임마? 내가 이래봬도" 하며 싸움을 시작한 순간, 삐익- 삑 마이크 잡음이 다시 들려왔다.


"아, 아, 지금 혹시 뒤풀이 참석 불편하신 분 있습니까? 드실 만큼 드신 분들은 가셔도 되니까 말씀하세요."


청년의 말에 사람들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술김에 약간 용기가 생긴 내가 손을 들었다.


"간다는 게... 어디로 가는 건가요?"

"가 보시면 압니다. 차편은 저희가 제공해드리고요."

"혹시, 진짜로 심판 같은 걸 받나요? 누구는 천국 가고, 누구는 지옥 가고?"


여기저기서 '아멘', '관세음보살'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저는 뒤풀이 행사 진행까지만 담당해서요. 다만, 가시기 싫은 분들은 여기서 원하는 만큼 오래 계셔도 됩니다. 백년이고 천년이고 계속 계셔도 괜찮습니다."




그 후로 3박4일 동안 아무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어디로 가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먼저 자리를 뜰 용기는 나에게도 없었다. 처음의 흥과 소란은 하룻저녁 만에 가라앉고, 사람들은 평상을 떠나 여기저기서 불안스레 수군댔다. 물론 계곡 옆에 죽치고 앉아 마시고 또 마셔대는 이들도 있었다. 안주가 떨어지면 검은 모자 청년이 손수레로 닭이며 파전 등등을 실어다 주었다. 그야말로 끝이 없는 뒤풀이였다.


"우리 여기 뜰까요? 신선놀음도 하루이틀이지."


땅바닥에 달팽이 그림을 그리다가 입을 열었다. 내 그림을 무심히 들여다보던 단발머리는 노인들 쪽을 흘끗 돌아보고는 대답했다.


"여기 지겹긴 한데, 나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혹시 알아요? 천국도 선착순일지."

"설마."


단발머리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읏차' 하고 일어섰다.


"가보죠, 뭐. 여기서 진짜 백년 천년 있을 건 아니니까."


우리는 닭백숙 들통을 나르고 있는 검은 모자 청년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저희 그만 갈래요."

"가시겠어요? 넵, 바래다드리죠. 잠시만요."


청년은 들통을 평상 옆에 내려두고 허리를 젖히며 스트레칭을 하더니 강당이 있던 산장 쪽으로 앞장을 섰다. 그 모습을 본 노인들이 하나 둘 다가왔다.


"아니, 진짜 가려고? 어디로 가는 줄 알고."

"젊어서 그런가, 겁들도 없네."

"아유, 나오지 마세요. 편히들 노시고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사회인 가면을 쓰고 친절하게 웃어 보였다. 청년은 둘을 산장 안으로 들여보낸 뒤, 강당을 가로질러 반대쪽 문을 열었다. 문 밖으로 나가자, 한밤중의 고속도로가 펼쳐져 있었다. 산과 계곡은 온데간데 없었다. 택시 한 대가 '예약' 표시등을 켠 채 스르르 와서 서자, 단발머리가 입을 쩍 벌렸다.


"와우, 택시라고? 진짜로 K-뒤풀이잖아?"

"조심히 가십쇼."

"차 번호는 안 적으세요? 그것까지 해야 될 분위긴데."

"잘 데려다주실 겁니다. 살펴 가세요."


우리는 뒷자리에 함께 앉았다. 택시 기사는 친절해 보이는 중년 여성으로, 내가 대학 시절에 살았던 하숙집 주인아주머니 같은 인상이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네? 그걸 제가 정하는 거예요?"

"그럼요. 어디든 모셔다 드립니다."

"진짜요? 막 천국 같은 데도 갈 수 있어요?"

"갈 수는 있는데 추천하고 싶진 않네요. 아까 계셨던 계곡이랑 비슷하거든요. 풍경이랑 메뉴는 다르긴 한데."

"그럼 그렇지."


우리는 각자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기사가 라디오를 틀자, '어디로 갈거나, 어디로 갈거나' 하는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였다.


"혹시 이승으로 다시 갈 수도 있나요?"

"거기도 갈 수는 있는데, 환생하는 건 아니고 그냥 영혼만 가는 거예요. 그래도 괜찮아요?"

"저 사실... 죽으면 이승을 떠도는 유령이 돼보고 싶었거든요. 투명인간처럼 여기저기 맘대로 돌아다니면서 구경도 하고, 가끔 내키면 착한 사람 도와주기도 하고, 그러면 재밌을 것 같아서요."

"하, 참."


택시 기사와 단발머리가 동시에 혀를 차며 웃었다.


"미련이 많으시네. 저도 결정했어요. 저는 망각의 강으로 갈래요. 그냥 다 잊어버리고 싶어요."

"망각의 강도 많이들 찾으시죠."


택시는 출발했다. 가는 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나는 곧 도착할 이승의 모습을 상상하느라, 단발머리는 영원히 잊어버릴 지난 인생을 마지막으로 회상하느라. 망각의 강 입구에 도착하자, 나는 단발머리와 악수를 나누었다.


"잘 가요. 반가웠어요."

"조심히 가세요."


단발머리를 보낸 나는 택시 뒷좌석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혼자가 되자, 드디어 뒤풀이가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 이제 드디어,


집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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