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발행 62일차
어깨에 닿은 바닥이 차가웠다. 눈을 뜨니 흰 바짓자락들이 마루 위를 오가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 가운데 “쟤는 여적도 자네” 하는 쉰 목소리가 귀에 걸려들었다.
나는 소스라치듯 벌떡 일어났다. 뭐야! 병원이 아니라고? 주위를 둘러보니 널찍한 강당 안에 노인들 천지였다. 숱 적은 흰 머리를 쪽 찐 할머니가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아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인 듯했지만, 곧 시선을 거두고 다른 노인들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천당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고, 애매허네 그냥."
"천당이나 지옥은 재판이라도 해서 보내겠지. 일단 여기 모아놓고."
"지옥이라니, 살아서도 맨 고생만 했는데 죽어서도 지옥은 안 될 말이지."
"아니 근데 언제까지 여기다 세워두는겨. 여긴 뭐 담당자도 없나? 저승사자라도 있어야 뭘 물어보지."
믿고 싶지 않았지만 여기는 저승이고 나는 죽었다는 소리였다. 어쩐지 벼랑에서 추락한 것치곤 사지가 너무 멀쩡하다 했다. 그놈의 단체산행만 아니었어도! 산꼭대기에서 상사들 기념사진 찍다 발을 헛디뎌 죽다니, 뭐 이딴 재수없는 인생이 다 있지? 지금쯤 그 상사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나는 꿈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강당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잠시 후 끼익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순간 정적이 흐르고 모두의 눈길이 문 쪽으로 쏠렸다. 검정 반팔티에 검정 캡모자를 쓴 청년이 단상에 올라가 손뼉을 짝짝 쳤다.
"자, 선생님들, 여기 좀 봐주세요. 다들 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고요. 바깥에 지금 뒤풀이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한 줄로 서서, 질서 있게, 천천히 이동해주세요."
이게 무슨 말인가. 생전 처음 보는 어르신들 사이에 끼어 뒤풀이를 하라니, 안 그래도 방금 죽어서 심란한 사람한테 너무하는 거 아닌가?
나도 젊었을 땐 친구들과 어울려 시험 뒤풀이, 엠티 뒤풀이, 축제 뒤풀이, 종강 뒤풀이 등등 온갖 명분의 뒤풀이를 즐겼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졸업과 동시에 모두들 뿔뿔이 흩어지고, 뒤풀이가 사라진 자리를 직장 단체회식이 대체하면서 사람 많은 술자리라면 질색하게 된 지 오래였다.
우물쭈물 서 있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쳤다. 흠칫 놀라 돌아보자, 나보다도 대여섯 살이나 어려 보이는 단발머리 여자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안 가시게요?"
"...가야 되면 가는 건데, 이런 거 별로 좋아하진 않아서..."
"에이, 딴 것도 아니고 인생이 끝났는데 뒤풀이는 가야죠. 뭐 맛있는 거라도 줄지 모르잖아요. 저승에선 뭐 먹고 사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듣고 보니 호기심이 일었다. 또래를 만나자 마음도 좀 놓였다. 나는 단발머리와 함께 거의 맨 마지막으로 강당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