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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Jun 03. 2022

나에게 쓴 편지가 도착했다

매일 발행 61일차

퇴근을 해보니 집앞에 편지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양평 용문사에서 온 편지였다.



석 달 전, 용문사로 2박3일 휴식형 템플스테이를 갔었다. 내 방을 가득 채운 온갖 물건과 책들, 쓰다 만 글과 지키지 못한 계획 등등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몸도 마음도 비워 보고 싶었다.



몇 년 만의 여행이라 무척 설렜는데, 실제로 가보니 상상한 것보다 더 좋았다. 고즈넉한 안뜰 테이블에 앉아 햇볕을 쬐며 책을 읽는 시간이 그렇게 여유로울 수가 없었다. 숙소의 기와지붕 너머로는 겨울나무 가득한 산과 탁 트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도시에서는 절대 보지 못할, 사진에도 담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아침잠이 많아 새벽예불은 일찌감치 포기했던 내가 놀랍게도 목탁소리에 잠이 깼다. 입김이 나오는 차가운 새벽, 어두운 산사를 혼자 걸어가는 동안 범종 소리가 깊게 울렸다. 까만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고, 예불이 열리는 법당만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맑고 신비로웠다. 나중에 절 아래 산길에서 '용문사 새벽 종소리'라는 시비를 봤는데, 한시 '용문팔경' 중 제1경이라고 한다.


북쪽 절에는 예불 올리는 종소리 길게 울리어
잠 깨어 보니 만가지 형상은 새벽빛이 짙구나
별들은 여기저기 보이고 바람은 나무숲을 감돌고
새벽안개 자욱한데 산봉우리에 달만 걸려있네
(양창석, 용문사 새벽 종소리)



아침에는 일출도 보고, 천 살이 넘었다는 은행나무에 소원도 빌었다. 할 일 없는 낮시간에는 숨 차지 않도록 느린 속도로 휘적휘적 산길을 걷기도 했다. 절 뒤편에 쌓여 있는 기왓장 소원문구도 읽어봤는데 재미있었다. 만사형통 운수대통 사업번창 무병장수... 사람들 바라는 건 다 비슷비슷한 듯.



영상도 책도 대화도 없이 오직 음식에만 집중하는 공양도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템플스테이 후기 보면 절밥이 맛있어서 또 오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던데 음... 생각보단 맛있고 건강해지는 느낌이었지만 계속 그렇게 먹을 자신은 없달까...ㅋㅋㅋㅋ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을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밥상에 붙어 있던 '오관게')


제일 맛있었던 건 스님이 직접 구워주신 화덕피자. 레시피도 적어놨다. 또띠아에 토마토소스를 얇게 바르고 아몬드슬라이스와 모짜렐라치즈를 뿌리고 고구마무스를 얹어 화덕에 구운 뒤 파슬리가루와 파마산치즈가루를 뿌리면 완성! 혼자 먹기엔 좀 컸지만 물론 다 먹어버림 ㅎ




템플스테이 사무실 앞에는 각종 팸플릿과 체험용품 등이 진열돼 있었는데, '나에게 쓰는 편지'도 그중 하나였다. 나에게 편지를 쓰면 석 달 후에 집으로 보내준다고 했다. 좀 찬찬히 생각해서 썼으면 좋으련만, 퇴소하려고 짐 다 싸놓은 상태로 쓰기 시작해서 그냥 아무말이나 썼다. 그 편지가 바로 오늘 도착한 것.


"계절이 바뀐 만큼 지루한 것 같았던 인생에도 뭔가 변화가 생겼기를 바라며, 혹시 아직도 지지부진하게 쳇바퀴를 도는 듯 느껴진다면 휴가나 한번 받아서 재밌는 며칠을 보내보기를. 계획이 취미면 뭐 어때? 계획을 생산하든, 걸작을 생산하든, 크게 보면 어차피 다 사라질 거고 그냥 각자의 자아실현일 뿐이라고. 꽃은 가만히 있어도 지 모습대로 피게 마련이고 너도 이미 피어 있는데 네가 모르는 걸 수도 있어. 그냥 즐기며 살자."


솔직히 이 편지를 쓰는 순간에도 석 달 안에 내 인생에 무슨 변화가 생길 거라는 기대감은 거의 없었다. 편지를 받을 때도 똑같이 살고 있을 것에 대비해서 휴가 운운하는 조언을 해놨는데, 템플스테이 한 달 후 브런치 매일 발행을 시작했으니 그때에 비해 변화가 있긴 있었던 셈. 외부에서 온 변화가 아니라 내가 만든 변화라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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