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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Jun 07. 2022

세 단어로 글쓰기_ 밤, 불, 비

매일 발행 65일차

처음에는 무릎 높이나 될까 싶은 어린나무였다. 숲과 맞닿는 마을 가장자리, 덤불에 묻혀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 나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일곱 살 레미였다. 깊은  가족들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져, 고성이 오가는 무서운 분위기를 피하기 위해 집을 나왔던 것이다. 훌쩍거리며 덤불 속에 숨어든 레미는, 작은 나무가 하얗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레미가 손주 셋을 둔 할머니가 되었을 무렵, 까마득하도록 하늘로 치솟은 그 나무는 마을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을 끄면 야광별이 빛나듯, 밤이 되면 나무는 온통 새하얀 색으로 변해 마을을 비추었다. 전기가 없던 시절, 그 마을에서 나무는 가로등이자, 등대이고, 소원을 비는 토템이었다.


그러나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끝없이 자라는 흰 나무 탓에 마을은 먼 곳에서도 너무나 쉽게 눈에 띄었고, 자주 침입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나뭇가지를 꺾거나 열매를 쓸어 가서 자기네 마을에도 번식시키려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흰 나무의 후손들은 모두 평범한 나무로 자랐으며, 빛이 나는 돌연변이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흰 나무를 베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주민들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신성한 나무를 톱질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마을의 원로가 된 레미도 나무를 지켜야 한다고 믿는 쪽이었다. 레미에게 나무는 마을의 상징이기 이전에 자신의 가족이자 친구였다.


하지만 레미의 자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무를 벨 수 없다면 자신들이 떠나겠다고 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조용히 살 수 있는 평범한 숲으로, 밤마다 창문에 암막커튼을 치지 않아도 되는 집으로 가고 싶다고. 레미의 자손들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주민들이 그렇게 하나둘 마을을 떠났다.


마침내 레미 혼자 마을에 남게 된 밤에는 가 쏟아졌다. 레미는 창문의 커튼을 걷은 채, 거센 빗줄기를 뚫고 방 안까지 하얗게 비추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계속 빛나느라 너도 참 오래 힘들었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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