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맞이 쇼핑 후기

by 이제

무슨 글을 쓰냐고요? 글이라뇨, 이건 그냥 상품평인데요. 상품평도 글이라고요? 이상한 분이시네. 그렇게 따지면 댓글도 글이겠네요. 네? 댓글도 글이라고요? '글'이라는 말까지어있잖냐고요? 이 아저씨가 진짜, 안 그래도 열받던 참인데 더 빡치게 만드네. 보통 사람들은 좀 진지하게, 길게 쓴 걸 글이라고 부른다고요. 이래봬도 저 글깨나 쓰던 사람이에요. 초딩 땐 글짓기 대회에서 우수상까지 받아봤다니까요.이라는 주제로 수필을 썼는데 내가 생각해도 감동적이었죠. 그런 게 글이지, 댓글 따위가 무슨.

그리고 내가 댓글을 쓰든 악플을 달든 그쪽이 무슨 상관이에요? 아하 알았다. 설문조사 한다고 접근해서 물건 팔아먹고, 제사 지내라고 하고, 그러려는 거죠? 나 그런 데 절대 안 넘어가거든요. 지금 이렇게 상대해주는 것도 안 속을 자신이 있어서라고요. 게다가 난 오늘 오후에 퇴원이거든. 좀 있으면 우리 엄마가 데리러 올 테고 병원에는 사람도 많은데 허튼짓이야 하겠어.

그나저나 이 인터넷 쇼핑몰 말인데, 이 사람들 완전 사기꾼이라니까요? 아참, 아저씨도 사기꾼이었지. 기분 나쁜 거 아니죠? 사기 쳐서 먹고 살려면 사기꾼이라는 말 정도는 감수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 정도 애환은 어느 직업에나 있는 거잖아요.

내가 올겨울 내내 여기 입원해 있었거든요. 스키 한번 못 타보고, 큰맘 먹고 지른 모직코트도 못 입어보고 겨울을 났다니까요. 퇴원하려니까 봄인 거야. 개구리처럼 겨울잠 자고 깨어난 기분이에요. 어디가 아팠냐고요? 아프기는 개뿔. 엄마 말로는 마음이 아픈 거라는데, 난 멀쩡하거든요? 이상한 건 다른 사람들이죠. 온 천지에 사기꾼 투성이잖아요. 이 병원만 해도 그래요. 멀쩡한 사람을 몇 달이나 입원시키는 이유가 뭐겠어요? 돈 벌려고 그러는 거죠.

알고도 가만있을 수 있나요. 고소를 한다거나 뭐 그런 건 너무 골치 아프니까 다른 방법을 썼어요.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좀 영악해질 필요가 있잖아요. 나 혼자 정직하게 살면 뭐해요?

어떻게 했냐면, 수능 공부를 시작했어요. 새로운 꿈이 생겼다고 했죠. 의사가 사기꾼이라는 걸 알면서도 입도끗 안 하고, 선생님처럼 따뜻한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어요. 내가 아직 완쾌되지 않은 건 알지만, 빨리 나아서 남들처럼 학원도 다니고 시험도 쳐보고 싶다고요. 학원 다니고 시험 치는 게 소원이라니, 말이 돼요? 그런데도 다들 모범생으로 살아와선지 잘들 속더라고요. 우리 엄마는 거의 감격까지 하고 말이죠. 하여간 공부만 하면 멀쩡한 줄 안다니까요. 제가 좀 연기를 잘하기도 했어요. 순진하게 생긴 인턴한테 수학 문제를 물어본 적도 있죠. 엄청 피곤해 보였는데 그 와중에도 친절하게 가르쳐 주더라고요. 제가 비슷한 문제를 풀어내니까 완전 뿌듯해하는 거예요. 그 사람도 앞으로 사기깨나 당하고 살 것 같아요.

결국 따냈어요, 퇴원 및 통원치료를. 그 말을 듣는 순간 창밖을 봤는데 햇살이 그냥 봄이더라고요. 지난주에 꽤나 따뜻했잖아요. 봄도 오겠다, 퇴원도 하겠다, 엄마가 기념으로 봄옷을 사준다더군요. 퇴원하면 백화점엘 가자는데 그런 옷은 비싸잖아요. 나 때문에 들어간 돈도 많을 텐데. 안 그래요? 내가 영악하긴 해도 양심은 있거든요.

안 그래도 공부가 슬슬 질리던 참이라 인터넷 쇼핑을 좀 했어요. 옷은 입어보고 사는 게 좋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요. 그러다 여기서 괜찮은 원피스를 본 거예요. 화사한 노란색에 디자인도 내 취향이고, 가을에 입던 트렌치코트나 가디건에도 어울릴 것 같고. 상품평도 나쁘지 않았어요. 이제 생각하니 알바들 같지만.

주문해서 받은 게 어제예요. 배송도 어찌나 늦는지, 퇴원하고 나서야 도착할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요. 기어이 오기는 와서 박스를 뜯었는데, 세상에! 노란색이 아니라 황토색 옷이 온 거예요! 나 참 기가 막혀서. 장사 그딴 식으로 해도 되는 건가요? 당장 항의 전화를 했죠. 성질대로 화를 냈다간 의사들이 트집을 잡을 테니까 최대한 교양 있게 지적을 했어요. 주문한 컬러를 잘못 보신 것 같다고. 그랬더니 그 원피스 색상은 옐로우와 블루밖에 없다면서, 자기들은 주문대로 보낸 게 맞다는 거예요. 모니터상의 색깔과 실제 색깔은 좀 다르게 보일 수 있다면서요. 그러니까 지금 내 핸드폰 화면이 문제라는 거 아녜요. 지들이 잘못해놓고 누구 탓을 하는 건지. 반품은 해준다는데 돈 들어오기 전까진 모르는 거잖아요.

안 그래도 짐 챙긴다 어쩐다 정신 없는데 이런 일까지 생기니까 어찌나 빡치던지, 상품평을 안 쓸 수가 없더라고요. 그 사람들도 좀 당해봐야죠. 그 옷이 어떤 옷인데요. 퇴원 기념으로 특별히 주문한 라고요. 이 뜻깊은 날 재수없게 이런 일이 터지다니, 게다가 아저씨 같은 사기꾼까지 병실에 멋대로 들어와서 귀찮게 굴지를 않나. 보안을 어떻게 하는 건지 원.

하긴, 의사 가운까지 차려입었으니 다들 속은 거겠죠? 흰 가운 그까짓 거 돈 몇 푼이면 아무나 사잖아요. 명품옷처럼 복제하기 까다로운 것도 아니고. 저기 돌아다니는 의사들 중에 진짜가 얼마나 되겠어요. 아, 그런데 엄마는 왜 안 오는 거야. 설마 우리 엄마도 새엄마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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