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발행 72일차
이렇게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데 계속 책상 앞에 앉아 있다니, 나도 참 대단하다. 이쯤 되면 명상 아닐까? 물론 진짜 명상이라기엔 마음이 전혀 고요하지 못하다. '이것도 별로' '저것도 별로' 하는 단편적인 생각들만 흙탕물 속 피라미처럼 이따금씩 핑- 핑- 지나가고 있다.
퇴근 후에 글을 쓰는 게 과연 맞을까? 특히나 오늘처럼 10시가 넘도록 야근하고 돌아온 날에도? 이런 멍한 머리로 뭘 쓰겠다고 이렇게 앉아 있는 걸까? 내가 나자신과의 약속을 이렇게까지 굳게 지키는 사람이었던가? 참 새로운 모습이라고 해야 할지. 아아 나도 아침잠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새벽 5시나 6시에 일어나서 말짱한 정신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최근 김중혁 작가의 에세이를 읽다가 흥미로운 글쓰기 방법을 발견했다.
A4 종이에 제목을 적어서 가지고 다닌다. 첫 번째 문장이 생각날 때까지 계속 들고 다닌다. 생각날 때마다 틈틈이 종이에다 글을 쓴다. A4 종이 한 장을 모두 채우면 그 내용을 컴퓨터로 옮겨 적는다. 그대로 옮겨 적는 건 아니고, 뺄 건 빼고 더할 건 더한다. 옮겨 적은 내용을 A4 종이에 프린트한 다음 그 뒤에다 연필로 이어 쓴다. 그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면 한 편의 글이 완성된다.
- 김중혁, [무엇이든 쓰게 된다], 위즈덤하우스, 28쪽
제목을 적은 A4 한 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틈틈이 쓴다는 게 직장인에게 딱 맞는 방식 같았다. 따지고 보면 틈틈이 글쓰기는 스마트폰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날로그형 인간인 나는 아직도 핸드폰의 터치 자판이 불편하고, 휴대용 키보드를 따로 가지고 다니기도 거추장스럽다. 꼬깃꼬깃 접은 종이 한 장에 펜 하나, 그렇게만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세상 제일 가볍고 아무 때나 꺼내 쓰기 쉬울 것 같았다.
그러던 차에 이번에는 김영하 작가가 <집사부일체>에 나와 이런 말을 했다. 소설을 쓸 때 정해진 틀 없이 일단 첫 문장을 쓰고, 다음 문장, 다음 문장을 '말이 되도록' 계속 이어 나가서 길게 쓰면 글이 된다고.
나는 소설을 구상할 때 전체 얼개를 미리 짜놓으려는 편이라서, 저런 식의 글쓰기가 무척 신기했다. 어쩌면 내가 너무 성질이 급해서 자꾸 큰그림부터 보고 계획부터 짜려고 덤비는 걸까? 지금 이 한 문장에 집중하기가 어렵고, 앞일이 예측되지 않는 상황을 견디지 못해서. 앞으로 주인공이 어떤 일들을 겪게 될지 미리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물론 '계획 없이 쓰기', '체계적으로 계획해서 쓰기'는 맞고 틀리고의 문제라기보다는 작가 개개인의 성향 차이고, 각각의 방식으로 잘 쓰는 작가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후자의 방식을 택해온 것이 그저 습관적인 관성 때문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아무튼 두 작가의 글쓰기 방식을 종합해 보면, 글쓰기에 필요한 것은 오직 종이 한 장, 펜 하나뿐이다. 제목과 첫 문장이 적힌 종이를 들고 다니면서 아무때나 다음 문장, 다음 문장을 이어서 쓰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심플할 수가!
이런 식으로 틈틈이 글을 써나가면 피곤한 밤에 헤롱헤롱 앉아만 있는 일은 좀 줄일 수 있을까? 한번 시험해봐야겠다. 지금까지 숱하게 많은 벼라별 시험들을 다 해봤던 것처럼...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