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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Jun 15. 2022

집에 돌아오다

매일 발행 73일차

('인생 뒤풀이' 다음 이야기)


인생 뒤풀이 1

인생 뒤풀이 2


"목적지 부근입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택시가 우리 동네에 다다르자 큰 한숨이 나왔다.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이제 귀신으로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어감상 귀신은 좀 별론가? 그렇다면 적당히 영혼이라고 해두자.


앞유리창 너머에 웬 이삿짐 트럭이 좁은 골목을 틀어막고 있었다. 트럭에 실린 가구들이 왠지 낯익었다. 내 책상, 내 냉장고, 내 왕자행거...? 내 방을 벌써 뺀다고! 저승에 다녀와 이제 막 집에 도착했는데, 죽은 지 3박4일밖에 안 지났는데, 발인도 방금 끝났을 텐데!


나는 택시가 서기 무섭게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기사가 내 뒤통수에 대고 뭐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필로티 주차장 안쪽에 있는 입구로 들어서니 커다란 플라스틱 상자를 등에 진 인부가 불쑥 튀어나왔다. 나도 모르게 몸을 비켰지만, 다음 순간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영혼이 아닌가? 영혼이 사람에게 부딪칠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아직 내가 이승에서 뭘 할 수 있는지 모른다. 혹시나 옥탑방까지 단번에 날아갈 수 있을까 해서 힘껏 뛰어올라보았다. 날기는 개뿔, 뛴 높이가 두 뼘이나 될까 말까다. 벽을 뚫고 들어갈 수 있을까 해서 벽돌벽에 손가락을 찔러보았다. 약간 뽀득거리는 질감으로 손가락이 쑥 들어가는데, 마치 꽃이용 녹색 스펀지 같은 질감이었다. 힘을 쓰면 뚫고 들어갈 수는 있지만, 아예 벽이 없는 듯이 통과되지는 않았다. 하긴 그러니까 지금처럼 땅에 발을 딛고 걸어다닐 수 있는 거겠지.


나는 생전과 똑같이 계단을 터벅터벅 올라 옥탑방 내 방으로 갔다. 아쉬움과 섭섭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성질 급한 가족들만 아니라면 나는 내 방에서 마지막으로 몇 시간만이라도 혼자 편히 쉬고 싶었다. 지겨운 회식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것처럼 양말도 벗지 않고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눕고 싶었다. 평생 모아 온 책들을 둘러보고 책상 앞에도 앉아보고 싶었다. 내가 써온 수많은 일기, 미완성 습작들도 다시 한 번 훑어보고 싶었다.


"야, 그걸 다 한 상자에 담으면 어떡하냐. 다 쏟아지라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형편없이 쉰 목소리였지만 분명 아빠의 말투였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내가 세상 제일 큰 불효를 저질렀으며 부모님이 자식의 죽음을 당했다는 현실을 절감했다. 차마 현관문 안으로 들어설 수가 없었다. 가족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무겁지도 않아, 이런 곰인형 같은 게 왜 쏟아져."


확연히 울먹이고 있는 오빠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도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영혼의 능력 하나 추가. 영혼도 울 수가 있다. 나는 큰 사고를 치고 집에 돌아온 꼬마처럼 쭈뼛쭈뼛 방 안으로 들어섰다. 콩가루집안이었던 우리 가족이 내 죽음을 계기로 한데 모여 짐을 싸고 있었다. 이렇게 다 모인 모습은 나도 몇 년 만에야 보는 것이었다. 가족들의 얼굴은 흙빛이고 입술은 마구 부르터 있었다.


아까 본 인부가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이 집 사정을 눈치채서 그런지, 몹시 조심스러워하며 말을 꺼낸다.


"저기 뭣이냐...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한데 책이 너무 많아서 트럭에 다 안 들어가네요. 웬만한 건 폐지로 내놓으시든가, 아니면 이 댁 차로 옮겨야 될 것 같은데."

"다 가져갑니다. 내 차에 실으면 되니까."

"하이고, 이 많은 거 다 어디다 쌓아두시려고... 아무래도 조금은 정리를 하시는 게..."

"큰 방 하나 비워놨어요. 거기 들여놓기만 하면 정리는 우리가 할 테니까..."


마지막 목소리는 엄마였다. 나는 그제야 가족들이 내 자취방을 이렇게 급히 빼는 이유를 알았다. 내 물건들이나마 집에 돌아오라고, 강릉 본가에 방 하나를 비우고 내 방을 만들어주려는 것이었다. 내 짐을 꾸리고 집으로 데려가는 일을 하면서 가족들은 겨우 정신을 붙잡는 듯했다. 투명인간 세상구경하듯 싸돌아다닐 생각뿐이었던 철없는 나는 급격히 풀이 죽었다.


트럭 짐칸, 옆으로 세워진 침대와 책상 사이에 끼어앉은 채 나는 몹시 고민했다. 서울에 남을까, 본가로 옮겨질 내 방으로 갈까. 보통의 인정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가족을 따라가는 게 맞았다. 하지만 어차피 가족들이 나를 눈으로 볼 수도 없는데, 그 슬픈 집에 들어가 있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나, 참 매정한 자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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