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발행 74일차
어린 왕자, 애린 왕자, 에린 왕자, 두린 왕자 (brunch.co.kr)
아직도 사투리에 대한 관심이 식지 않고 있다. 그동안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에 많이 질려 있었나보다.
일단 3개 지역어 버전 어린왕자를 섭렵했다. 제주어 어린왕자를 끝까지 읽은 뒤, 경상도 버전 오디오북을 정주행했고, 지금은 전라북도 버전 오디오북을 듣고 있다. 제주어는 오디오북이 없어서 아쉬웠지만 글로 읽는 것도 나름 재밌었고, 경상도 버전과 전라북도 버전 오디오북은 어린왕자의 성격이 사뭇 다르게 표현된 점이 흥미로웠다. 경상도 어린왕자는 쓸쓸하고 연약한 느낌인데 전라북도 어린왕자는 깨발랄 꾸러기 목소리다.
제주어 음성콘텐츠를 찾기가 생각보다 어려웠다. 제주 마을미디어 팟캐스트조차 대부분 표준어로 진행하는 점이 아쉬웠다. 제주어를 배우는 프로그램들도 있었지만 한 단어씩 찔끔찔끔 배우는 건 너무 감질난다. 내가 들어보고 싶은 건 주민들의 자연스러운 대화나, 처음부터 끝까지 제주어로 말하는 낭독 콘텐츠 같은 것들이었다. 찾다찾다 오늘은 KCTV제주방송 어플까지 깔아서 <제주어 뉴스>를 몇 편이나 들었다. 가끔씩 이렇게 뭔가에 꽂혀서 난리법석을 떨곤 한다...
기나긴 검색의 여정 끝에 발견한 게 국립국어원의 '지역어 종합 정보' 홈페이지였다. '지역어는 살아 있는 우리의 문화입니다'라는 문구를 보니 신선했다. 국립국어원은 표준어 중심으로 돌아가는 곳인 줄 알았는데... 홈페이지는 아직 시범운영중이었지만 지역어 검색, 지역어 지도, 문학작품 속 지역어 등등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내가 찾아 헤매던 바로 그것, 지역민 음성자료가 있었다! 문자기록에 표준어 해석까지, 와우.
조사자: 달집은 어떻게 짓는?(달집은 어떻게 짓는)
제보자: 인자 밑에다가 인자 짚 겉은 걸 많이 옇고 대 째다가 인자 세워 갖고 집을 맹글어 갖고 요리 해. (이제 밑에다가 이제 짚 같은 걸 많이 넣고 대 베다가 이제 세워가지고 집을 만들어가지고 이리 해.)
제보자: 인자 거따 인자 또 솔을 베다가 또 인자, (이제 거기다 이제 또 소나무를 베다가 또 이제)
제보자: 해갖고 그래 인자 꼬시리는 거 인자. (해가지고 그래 이제 불사르는 거야 이제.)
제보자: 보름에 달이 뜨믄 인자 볼보롬허니 뜨문 인자, 거따 소원 빌지요 젝제금 인자, 모 자석한테 허구 잔 사람 머 뉘한테 허구 잔 사람 들멕임성, (보름에 달이 뜨면 이제 불그스레하게 뜨면 이제 거기에다 소원 빌지요. 각자('젝쩨금'은 '각자'의 뜻) 이제. 뭐 자식에게 하고 싶은 사람 뭐 누구한테 하고 싶은 사람 들먹이면서.)
- 세시풍속, 전라남도 광양시
제보자: 저 이디 우리 집사름도 저 해녀를 해나난 이젠. (저 여기 우리 집사람도 저 해녀를 했으니까 이제는.)
제보자: 중간에 그 쩌 인력 없는, 딴 집안은 씨어멍 잇곡 일 도와주는 사름덜 잇는 사름은 바당에 놈 갈 때 가곡 헤야 뒈는디. (중간에 그 저 인력 없는, 다른 집안은 시어머니 있고 일 도와주는 사람들 있는 사람은 바다에 남 갈 때 가고 해야 되는데.)
제보자: 우린 일이 하 노난 일허다 보민 제 시간에 바당에도 못 가민 도/름차세 헤영 가민 그 거리가 멀어 노니까 이젠 교통이 좋으난 허되. (우리는 일이 많아 놓으니까 일하다 보면 제 시간에 바다에도 못 가면 달음박질 해서 가면 그 거리가 멀어 놓으니까 이제는 교통이 좋으니까 하되.)
제보자: 이제 해녀덜 뭐 오도바이 다 자동차 영 헨 헴쭈마는 옛날은 그 바당 가는 길이 아리랑 고개라양. (이제 해녀들 뭐 오토바이 다 자동차 이렇게 해서 하지만 옛날에는 그 바다 가는 길이 아리랑 고개예요.)
- 세시풍속,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국립국어원에서 이런 일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솔직히 그동안 국어원에 대한 막연한 인상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가끔씩 '새로 추가된 표준어' 목록이 발표될 때면, 이 흔한 단어들 몇 개를 표준어로 지정하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과 논의가 필요했던 건지 의아했다. '맞다'와 '얼레리꼴레리' 대신 '맞는다', '알나리깔나리'로 써야 한다는 규정도 납득되지 않았다. 표준어의 필요성은 알지만 한 기관이 표준어를 일방적으로 정하는 게 과연 바람직할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지역어 자료를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국립국어원은 '국어'에 진심이었구나 싶다. 표준어만이 국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당연하지만) 알고 있었고, 지역어를 지키려는 노력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사를 찾아보니 앞으로는 지역별 언어문화 디지털 자료관을 구축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동안 내가 국어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해했던 것 같아 조금 미안해진다. 가끔 답답한 구석이 있어서 그렇지, 실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해 왔던 거다. 앞으로는 좀 더 관심과 응원을 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