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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를 쳐본 경험은 국민학교(...) 시절 동네 학원에서 체르니 30을 배우다 중도포기한 것, 대학 시절 동아리방 피아노로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1악장을 연습한 것이 전부였다. 이 곡은 지금까지 천 번은 족히 쳤을 것이다. 너무 유명한 곡이라 식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직접 쳐보면 우아하게 이어지는 셋잇단음표들을 따라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 든다. 막 어려운 곡은 아니라 부담없이 자주 칠 수 있고, 화나는 일이 있거나 할 때는 마구 빠르게 치면서 스트레스를 풀 수도 있다. 피아니스트가 들으면 기겁할 연주겠지만...
막상 피아노를 사고 보니 왜 그렇게 고민했나 싶게 설레고 기뻤다. 비좁은 공간에 겨우 욱여넣어 방문도 활짝 못 열게 됐지만 어쨌든 방에 피아노를 들여놓을 수 있다는 자체가 내 자취인생에서는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내 삶에 음악이 들어왔다는 사실이 존재감 있게 눈으로 보였다.
관악기나 현악기보다 건반악기를 좋아한다. 한 음 한 음 맑고 또렷하고 정확한 그 소리가 좋다. 여러 음을 한번에 눌러 풍부한 화음을 표현할 수 있는 점도 좋다. 건반을 두드리는 느낌도 좋고, 아주 낮은 음에서 아주 높은 음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느낌도 좋다. 연주할 줄 아는 곡이 없어도, 누르면 누르는 대로 맑은 소리가 울리는 것이 즐겁다.
피아노를 사고 처음에는 월광 1악장을 다시 익히는 것부터 시작했다. 십여 년을 안 쳤더니 깨끗이 잊어버린 상태였다. 남들은 오랜만에 다시 쳐도 손가락이 기억한다고 하던데 나는 아니었다. 피아노 초보에게 악보 읽기란 고난의 행군이다. 오선을 벗어난 음표가 많거나, 음표 자체가 많거나, 샾·플랫·제자리표가 많으면 특히 더 힘들어진다. 음 하나하나를 '도, 레, 미, 파, 솔, 라, 시' 하고 무식하게 읽어낸 끝에 한두 달쯤 걸려 다시 칠 수 있게 되었다. 걱정과는 달리 몇 번 치고 질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릴 땐 피아노 연습이 싫었다. 치기 싫은 곡도 무조건 쳐야 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농, 체르니, 소나티네, 부르크뮐러, 피아노소곡집, 다섯 권 세트로 진도를 나갔는데 그중에 진짜 좋아서 치는 곡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열 번 쳐서 동그라미 열 개를 색칠해야 하는데 한 번 치고 두 개 세 개 색칠하고 그랬다. 연습을 대충 한다고 혼나기도 여러 번이었다.
어른이 되어 피아노를 치니 좋은 점 하나는 치고 싶은 곡만 쳐도 아무도 뭐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피아니스트가 될 것도 아니고, 딱히 누구에게 들려주려고 치는 것도 아니니 그저 나 혼자만 재밌으면 충분했다. 음치도 코인노래방에서 실컷 노래부를 자유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못해도 된다'는 사실이 뜻밖의 해방감을 줬다. 회사 일은 일이니까 잘해야 하고, 글쓰기는 잘하고 싶으니까 잘해야 한다. 그런데 피아노는 순수하게 취미로서 즐길 수 있었다. 연습하면서 답답할 때도 많았지만, 딱히 무슨 마감이나 시험이 있는 것도 아니니 천천히 조금씩만 연습해도 상관없었다. 악보와 건반에만 집중하며 한 음 한 음 소리내다 보면 복잡한 세상사는 어느새 잊혀졌다.
물론 테크닉 연습을 하지 않으니 연주는 엉망진창이다. 화음은 좀처럼 동시에 눌러지지 않고, 4·5번 손가락은 휘청거리며, 박자는 어정쩡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름대로 감정표현은 가능하다. 우울할 땐 무겁게, 즐거울 땐 가볍게, 기분쯤은 낼 수 있다. 그거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