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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Jun 21. 2022

피아노 초보지만 베토벤 소나타 2

매일 발행 79일차

감명깊게 본 웹툰 <나빌레라>. 일흔의 나이에 발레에 도전한 덕출 할아버지 얘기다. 발레단을 찾아가 사정사정한 끝에 겨우 연습을 시작했는데, 단순하고 지루한 기본동작만 끊임없이 시키는 거다. 젊은 단원들처럼 더 멋진 동작도 해보고 싶은데... 그런 덕출 할아버지에게 단장이 하는 말.


"혹시 마음이 조급하세요? 발레를 빨리 배우고 싶으시죠? 수준 있는 동작들도 어서 해내고 싶으시고요?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한 말씀 드릴게요. 혹시 야매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다른 곳으로 가주세요!"


크헉. 야매를 원하냐는 저 한마디가 내 복부를 강타했다. 기본도 없으면서 성급하게 저 먼 곳을 기웃거리는 사람, 그게 바로 내가 아닌가. 내 삶 전체가 야매로 점철된 인생이 아니었던가.




월광 1악장을 그럭저럭 치게 되자, 슬슬 다음 곡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독보의 괴로움을 무릅쓸 만큼, 수백 번을 쳐도 질리지 않을 만큼 확 꽂히는 곡이어야 했다.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니 자연히 피아노곡에도 관심이 가서, '피아노 독주곡' 플레이리스트를 찾아 듣고, 유튜브에서 콩쿨 영상 같은 것들도 찾아보게 됐다. 그러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상대와 운명처럼 맞닥뜨리게 되었으니, 바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1악장이었다.


백건우, Beethoven : Piano Sonata No.8 'Pathetique' : I. Allegro di molto e con brio


이 곡의 어떤 점이 그렇게 끌렸던 걸까? 글쎄... 그 당시 내 정신상태의 주파수가 이 곡과 들어맞았다고나 할까. 무겁고 비극적으로 시작했다가 어느 순간부터(위 영상 1분 48초 지점) 미친듯이 달려나가며 강하고 단호하게 상승하고 하강하는 전개가 너무 멋있었다. 나도 이 현실에서 그런 식으로 달려나가고 싶었던가보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진지하게 고민했다. 딱 들어도 내가 칠 수는 없는 곡이었다. 길이도 길고 속도도 빠르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니까, 악보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구경쯤은 해볼 수도 있는 거니까, 악보를 샀다. 이왕 샀으니까 중간에 그나마 좀 음표가 적어 보이는 부분을 쳐봤다. 그러다가 어느새 본격 연습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야매의 길을 걷게 될 미래가 뻔히 보이는데도 그냥 치고 있었다. 고생만 하고 중도포기할 가능성이 큰 걸 알면서도 대책없이 가고 있었다.


속도가 빨라지는 11마디부터는 음표가 많지 않은 편이어서 오히려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물론 접근만 쉬울 뿐 제대로 치기는 불가능에 가까움). 오히려 가장 큰 고비처럼 느껴지는 부분은 맨 처음 열 마디였다. 음표가 너무 많았다. 어디부터가 왼손이고 어디부터가 오른손인지도 헷갈렸다. 플랫이 3개인 것만도 골치가 아픈데 중간중간에 임시표는 또 왜 이리 많은지. 답답한 나머지 아예 악보를 새로 그려버렸다.



A4용지에 줄간격이 널찍널찍한 오선을 인쇄하고, 그에 맞게 음표도 큼직하게 간격도 넓게 그렸다. 오른손은 빨간색 왼손은 초록색으로 구분했다. 조표와 제자리표를 없애버리고 검은 건반은 무조건 음표 하나하나에 임시표를 붙여 표시했다. 참... 무식하다고 해야 할지 집념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이렇게 하니 그나마 진도를 나갈 수 있었다.


머리로는 안다. 지름길은 없다는 진실을. 기초부터 차근차근 테크닉과 초견을 연습하며 성실하게 나아가야 실력이 는다는 것을. 그러나 내 마음은 삐딱하게 말한다. '야매가 뭐 어때서! 그럴 수도 있지!'


이 곡의 마지막 마디를 칠 수 있게 된 것은 무려 1년여가 지나서였다.


피아노 독학러의 구세주 '피포'느님의 양손느리게 악보배우기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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