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인터넷에서 MBTI 유형에 따라 일기 쓰는 스타일이 다르다는 글을 봤다. 직관형(N)은 본인 속마음 위주의 추상적인 일기를 쓰고, 감각형(S)은 그날 있었던 일을 그대로 기록하는 경향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직관형: 잊어버리자. 이미 지난 일 생각해서 뭐하냐. 그 사람들도 다들 자기 인생 사느라 바쁘다. 다른 사람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다. 없겠지? 제발 없기를.
감각형: 오늘은 민지랑 카페 가서 망고빙수랑 민트초코 먹고 코인노래방도 갔다. 집에 오다가 길에서 넘어져 무릎이 깨졌다. 사람들이 다 쳐다봐서 너무 쪽팔렸다.
MBTI의 신빙성을 떠나서 내가 그동안 쭉 전자에 가까운 일기를 써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옛날 일기를 읽어도 그때 내가 뭐 했는지를 알 수 없는 이유, 20년 넘게 일기를 쓰고도 묘사나 대화 같은 디테일에 약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외부 상황을 감각적으로 관찰하고 체험하기보다는 내 머릿속 정신세계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걸 이제야 알았다니...
솔직히 관찰력이 좋은 편이 아니다. 또는 관심사가 편중되어 특정 분야에 대한 관찰력이 부족하다. 특히 타인의 외양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매일 만나는 직장동료가 같은 옷을 입었던 기억이 없다. 1년 내내 매일매일 다른 패션이었을 리가 없는데, 남의 옷차림 자체가 뇌에 입력되지 않는 것이다. 가끔은 ‘오, 예쁜 옷이다’라거나 ‘오, 저 옷은 다림질 안 해도 돼서 편하겠는데?’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즉시 생각이 날아가 버린다. 하물며 남이 신은 신발이나 들고 있는 가방에는 눈길조차 가지 않는다. 하루종일 같이 다닌 사람이 맨발로 길거리를 걷고 있었대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큰일이다. 이래서 글을 어떻게 쓰지?
물론 머릿속 정신세계에 치중하더라도 뭔가 깊은 사유와 지적인 탐구를 했더라면 그 방면으로는 괜찮은 글을 썼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딱히 그렇지도 않다. 10년 전에 쓴 일기를 지금 다시 읽어봐도, 오글거리고 소름이 돋긴 하지만 생각하는 수준은 비슷한 것 같다. 역시 큰일이다.
쓰고 싶은 장르가 감성에세이든 하드보일드 소설이든, 지식정보를 전달하려는 전문서적이 아닌 이상 독자들이 오감을 통해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써야 공감을 얻기가 쉽지 않을까. 그런데 나는 그 부분을 놓치고 이제까지 살아온 것이다. 나 여태 뭐한 거지.
앞으로는 나를 둘러싼 현실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주의깊게 듣고, 자세히 봐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일기장에 '대화', '묘사', '행동', '콘텐츠' 관련 내용을 매일 한 줄 이상 기록해보기로 한다. '한 문단씩' 하고 지나친 욕심을 부리면 못 지킬 게 뻔하니까 딱 한 줄이라도, 예를 들면 이렇게.
(묘사) 오늘은 촤르르 꼬르륵 바닷물 출렁이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깼다. 아침알람용 백색소음 선별하느라 어제 멜론앱 붙들고 한참 고생했다. 제목은 빗소리인데 라디오 잡음처럼 들리는 음원이 많아서.
(행동) 미라클 모닝 3일째, 오늘은 어제보다 이른 5시반경에 책상 앞에 앉았다. 아침에 글쓰고 퇴근 후엔 노는 식으로 작업시간과 취미시간을 분리하니 아침에도 저녁에도 마음이 편해서 좋다. 제발 오래가자.
(대화) 점심시간 구내식당에서. "오늘 왜 이렇게 사람이 없는지 알겠다. 메뉴가 이래서 그랬구나." "가자미튀김 발라먹기 너무 힘들지 않아요?"
(콘텐츠) 목 빠져라 기다린 <헤어질 결심> 개봉일. 퇴근하자마자 버거킹에서 저녁을 때우고 빠른걸음으로 영화관에 갔다. 인상깊었던 대사. "@#$%@#%$^$%&%^&#%$^(스포방지를 위한 모자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