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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Jun 28. 2022

피아노 초보지만 베토벤 소나타 3

매일 발행 87일차

피아노 초보지만 베토벤 소나타 2


비창 1악장을 혼자서 6개월이 넘게 연습했지만 진도는 지지부진했다. 전체 310마디 중에서 132마디까지는 어찌어찌 건반을 짚게 되었는데, 도입부가 변형된 133마디부터 막혀버렸다. 처음 1~4마디와 비슷한 진행이면서도 음표가 다 달랐다.


1~4마디


비슷하지만 다른 133~136마디


마음먹고 달려들면 읽을 수야 있었겠지만 왠지 엄두가 나지 않고, 이미 연습한 앞부분에서만 맴돌게 되었다. 전환점이 필요했다.




집에서 도보 15분 거리에 성인 피아노 학원이 있었다. 가볼까 말까, 학원비는 얼마일까 하고 밖에서 서성대기만 몇 달. 큰 결심을 하고 쭈뼛쭈뼛 들어가보니 금빛 샹들리에 아래 그랜드피아노 한 대가 우아하게 놓여 있었다. 럭셔리한 인테리어에 주눅이 들었으나 이왕 들어온 거 어쩌겠는가. 상담을 받아봤다. 학원비는 생각보다 비쌌지만 밤 11시까지 연중무휴로 운영하며, 아무 때나 연습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고민 끝에 이번에도 지역화폐를 이용해 3개월 등록을 했다.


등록 첫날 혼자 연습실에 들어가봤다. 오직 피아노와 나 단둘이 대면하는 좁은 공간. 회사-집-회사-집만 왕복하다 갑자기 옷장 속 딴세상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조심스레 건반을 눌러보고 움찔했다. 소리가 너무 컸다. 소리도, 누르는 느낌도, 집에서 치던 디지털피아노와는 딴판이었다. 아무리 살살 쳐도 옆방에서 다 들릴 것 같았다(실제로도 다른 방에서 연습하는 소리가 들렸다). 약음페달을 누른 채로 머뭇거리며 월광1악장을 쳐봤다. 앞으로 마음 편히 연습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물론 몇 주쯤 지나자 누가 듣거나 말거나 있는 힘껏 와장창창 쳐대게 되었지만.


그보다 큰 고비는 바로 레슨이었다.


첫 레슨을 기다리면서 취업 면접 못지않게 떨렸다. 어떤 선생님일까? 무서우면 어떡하지? 혼자서만 연습하던 곡을 남에게 들려주는 것만도 너무 긴장되는데 심지어 상대가 엄청 잘 치는 사람이라니, 내 연주(???)가 얼마나 말도 안 되게 들릴까!


나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선생님이었지만 전공자의 아우라에 그저 기가 죽었다. 낯가림 심한 내가 처음 보는 사람과 좁은 연습실 안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너무 어색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그 순간이 왔다.


“연습한 데까지 한번 쳐보실래요?”


내가 무슨 짓을 벌인 건가! 무슨 객기로 학원을 등록했을까! 이 순간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까! 으아아악 어떡해! 등등의 온갖 내적비명과 함께 아드레날린이 천장까지 솟구쳤다. 이쯤 되어서는 취업 면접보다 더 떨렸던 것 같다(써놓고 보니 내가 봐도 내 성격 겁나 소심한 듯).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듯 첫 음을 치고 달달 떨리는 손으로 뒤뚱뒤뚱 나아가기 시작했...지만 중간에 머리가 하얗게 되면서 손이 딱 멈춰버렸다. 나 같은 초보자에게 피아노 연주란 뭐랄까, 물 위를 달리는 것과 비슷하다. 한 발이 빠지기 전에 다음 발을 딛고, 정신없이 막 뛰다가 삐끗해서 가라앉으면 끝이다. 빠진 자리에서 솟아올라 다시 뛰는 건 불가능하다. 물가로 헤엄쳐 나와 처음부터 달려야 한다.


연습한 만큼도 못 치고 멘붕이 와버려 속이 상했지만 뜻밖에도 선생님은 ‘음... 큰일이네요’라거나 ‘혹시 다른 곡부터 배울 생각은 없으신지?’라는 말 대신 잘하셨다며 첫 장의 기본적인 악상을 알려주셨다. 이 부분은 아주 강하게 쳤다가 점점 약해져야 한다는 식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진도를 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선생이라도 '음, 이렇게 치는 정도니까 이런 걸 가르치면 되겠군' 하는 생각뿐이었을 텐데 왜 그렇게 겁을 먹었을까. 이것도 혹시 자의식 과잉인가? 못 치는 게 당연한데 못 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걸까? 피아노는 취미니까 잘할 필요가 없어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 혼자 있을 때 얘기였다. 혼자서야 무슨 용기를 못 낼까.


6~7마디


선생님이 시범으로 이 부분을 치는 순간 마스크에 가려진 입이 딱 벌어졌다. 이런 게 말로만 듣던 음색이라는 거구나! 내가 칠 때는 피아노(p) 부분이나 포르티시모(ff) 부분이나 똑같은 느낌인데, 샘은 가볍게 떠올랐다 쿵 하고 무너지듯이 살려서 치셨다. 같은 악기로 같은 건반을 두드리는데도 음색이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는 게 너무 신기했다.


정신없이 50분간의 레슨이 끝나자 꼬마유령 캐스퍼처럼 생긴 영혼이 푸슈슈 하고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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