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 Aug 21. 2022

모래시계 공방

박모래 씨는 모래시계 공방을 운영한다. 원래는 유리공예가 전공이었는데 대략 칠팔 년 전부터 모래시계를 주력으로 만들고 있다. 의뢰인이 원하는 시간과 모양에 따라 맞춤형 시계를 만들어 준다. 모래가 흘러내리는 속도를 미세하게 조정하기 위해 외과의사처럼 현미경을 쓰고 모래구멍을 연마한다.


공방에는 박모래 씨의 키높이에 달하는 커다란 모래시계가 있다. 100일짜리 모래시계다. 놀이공원 대관람차처럼 원형 프레임을 짜서 무거운 모래시계를 뒤집을 수 있게 해놓았다. 박모래 씨는 이 모래시계로 100일마다 새로운 계획을 세우곤 한다. 지금은 ‘100일 동안 매일 하늘 보기’를 실천하고 있다. 공방에 틀어박혀 작업만 하다보면 시력도 건강도 훅 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모래가 다 떨어질 때까지 하루 한 번은 꼭 상가 밖으로 나가 하늘을 보려고 한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53시간짜리 모래시계 제작을 의뢰한 삼십대 초반 회사원이다. 너무 큰 시계는 부담스러우니 가격이 좀 더 나가더라도 최대한 작게 만들어달라는 주문이었다. 이럴 때는 특별히 고운 모래를 쓰고 아주아주 미세하고도 균일한 모래구멍을 만들어야 해서, 작업이 꽤 까다롭다.


완성까지 열흘 이상 걸린다고 미리 말했는데도, 회사원은 매일같이 퇴근길에 공방을 들른다. 딱히 독촉을 하는 것도 아니고, 별말도 없이 모래시계와 색모래 샘플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낸다. 박모래 씨는 이런 손님들을 위해 카페처럼 테이블도 몇 개 놓고, 음료 몇 가지도 구비해놓았다. 공방 운영만으로는 아무래도 수익이 안 나니까.


“그런데 왜 하필 53시간이에요?”


“금요일에 퇴근해서 집에 온 순간부터 일요일 밤까지, 딱 53시간 동안은 저만의 시간으로 보내려고요. 금요일 저녁에 모래시계를 뒤집으면서 휴일이 온 걸 기념하는 거죠.”


듣고 보니 괜찮은데? 박모래 씨는 싱긋 웃으며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리필해준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시간을 특별히 소중하게 여기는지, 어떤 시간을 굳이 눈으로 보고 싶어하는지 듣는 일은 늘 흥미롭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시간을 유리병에 고이 담아주는 이 일이 마음에 든다.


(이미지 출처: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내 얘기를 솔직하게 한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