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절의 고해성사

by 이제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이 별로 없네요.

한 번도 성당에 가본 적은 없지만 오늘은 그 뭐냐, 고해성사라는 걸 해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만우절에 고해성사라니 좀 이상하지만 오늘이 제 마지막 날이 될 것 같아 어쩔 수가 없군요. 석 달 전에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거든요.

만우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젊은 시절에는 만우절이 설날 추석보다 더 신나는 명절이었죠. 허언증 환자한테는 이날만큼 좋은 날이 없어요. 실컷 거짓말을 할 수 있어서? 아니죠, 평소에도 거짓말은 실컷 해요. 다만 그날은 누구나 거짓말을 하니까, 그날만큼은 나도 보통 사람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편한 겁니다. 그날이 지나가면 아쉽죠. 365일 만우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남들은 왜들 그렇게 정직하게 사는지.

거짓말하는 버릇을 고치고 싶진 않았어요. 그게 제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였으니까요. 사실대로만 말하는 건 너무 단순하잖아요. 거짓말을 하려면 은근히 생각도 많이 하고 공부도 많이 하고 연기도 잘해야 하거든요. 창조적인 종합예술인 셈이죠.

아, 그렇다고 뭐 제가 거짓말로 남들한테 사기를 쳐먹었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컨닝해놓고 안 했다고 하고, 돈 훔쳐놓고 안 훔쳤다고 하고, 안 지킬 공약 꼭 지키겠다고 하고, 그런 거짓말은 재미있는 구석이 하나도 없잖아요. 제가 아무리 거짓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지만 남한테 피해 주면서까지 뻔뻔하게 굴고 싶진 않았어요. 철저히 저 인생에 대한 거짓말만 했단 말입니다. 아프리카 여행을 가본 적이 있다거나, 이혼 경험이 있다거나, 어머니가 제주도 해녀였다거나, 뭐 그런 것들이죠.

가까운 사람들은 배우나 작가가 되는 게 어떻겠냐고도 하더군요. 다들 모르고 하는 소리죠. 영화나 소설은 처음부터 거짓말인 거 다 밝히고 시작하는 거 아닙니까. 시시한 짓이죠. 내가 상상한 대로 말하고, 내 상상에 생생하고 디테일하게 살을 붙이고, 그 거짓말을 누군가가 실제로 믿는 표정을 보는 것, 그게 얼마나 멋진 일인데요. 그래서 전 피씨통신이나 인터넷 채팅에도 관심이 없었어요. 얼굴도 안 보고 속이는 게 무슨 재밉니까.

물론 어려운 점이 없지는 않았어요. 특히 어머니가 제주도 해녀였다는 거짓말은 난이도가 높았죠. 웃기지만 실제로 제주도에 취재 여행까지 다녀왔는데, 아무리 연습해도 제주도 사투리의 벽을 넘기가 힘들더군요. 그래서 이번엔 어머니가 제주도 해녀였던 건 맞는데 남편 없이 아이 키우기가 힘들어 서울에 있는 친정집에 보냈다, 나는 외할머니 손에 길러졌고 어머니는 일 년에 두어 번 만나는 게 다였다, 서울에서 외로운 어린시절을 보냈다, 사투리 때문에 엄마랑 말이 통하지 않을 땐 너무 슬프고 답답했다는 식으로 꾸며냈죠. 그런데 어떤 사람이 묻더군요. 제주도 해녀 친정집이 서울에 있는 게 말이 되냐고…… 하…… 그래서…… 사실 어머니는 바이올린을 전공한 서울 사람이었는데 콩쿨 탈락으로 닥쳐온 슬럼프를 극복하지 못하고 제주도로 귀촌해 해녀가 된 거다…… 라고 했죠…… 최선을 다해 연기를 했지만 그만 저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어요. 제대로 망한 거죠.

보통 그렇게 거짓말이 들통나면 대놓고 욕은 안 먹어도 미친놈 보는 눈빛 정도는 받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러지 않았어요. 심지어 더 크게 폭소를 터뜨리더군요. 비웃는 게 아니라, 정말 재밌다는 듯이 말입니다. 사실 그 사람은 개그우먼 지망생이었거든요. 무슨 일에든 웃을 준비가 되어 있는 여자였죠. 그래서…… 허참…… 이거 너무 뻔한 전개라 제 거짓말보다도 못한 것 같지만…… 네 뭐…… 그 사람이랑 결혼했습니다. 쿨럭…… 아들도 생겼죠……

가정을 이루고 나서는 거짓말을 자제하려고 노력도 하고…… 안정된 직장을 가지려고 택시 회사에도 들어갔어요. 하 참, 그런데 택시 기사라는 직업이 저한테는 딱 최적이면서도 최악이지 뭡니까. 매번 다른 손님들을 만나니까 거짓말하기가 너무 좋은 거예요. 어차피 한번 보면 안 볼 사람들이니까 부담도 없고 말이죠.
그런데 그게 착각이었던 겁니다. 세상이 그렇게 좁을 줄이야…… 신나게 썰 풀었던 손님이 알고 보니 아내의 여고 동창이었다거나, 아들의 유치원 선생이었다거나, 그런 일들이 끊이질 않았죠. 아내 친구들 사이에 소문이 돌고, 유아원에 불려가서 새파란 선생한테 혼나다시피 하고 나서야 거짓말을 아예 끊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제야 깨달았죠.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다는 걸…… 그동안 머릿속에 쌓아둔 수많은 거짓말의 아이디어와 플롯과 디테일 따위가 입만 열면 저절로 튀어나오는 거예요.

어떻게 이혼까지 하게 됐는지는 어머니한테 들었겠죠. 나와는 나르게 정직한 사람이었으니까 그 얘길 그대로 믿어도 됩니다. 다 제 탓이죠. 더 노력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냥 뛰쳐나와 버렸어요. 솔직히 말하면, 끊을 수 없었던 게 아니라 내심 끊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들한 그저 미안할 뿐이죠. 아무리 욕 먹어도 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점잖은 신부가 되었으니 참……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병들어 눈이 침침해서 그런지, 정말 아들이 아니라 어떤 젊은 신부님처럼만 보이네요. 이렇게 고해성사 해봤자 어차피 난 지옥 가겠죠? 어차피 지옥 갈 바에야,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보태고 싶네요.

지금까지 한 말도 다 거짓말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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