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인물들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체를 빌려 만든 <트루 러브>라는 소설이 러시아에서 2008년 발매되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최적화된 AI의 예술, 최상은 아니다)
인공지능(AI)이 쓴 소설이 일본에서 SF문학상 1차 심사를 통과했다. 소설 제목은 ‘컴퓨터가 소설을 쓰는 날’로, 인공지능의 ‘고독한’ 심정을 묘사했다. (인공지능이 쓴 문학 소설, 전문을 읽어보니…)
머지 않아 AI가 개인의 취향에 맞는 곡을 주문에 따라 생산하거나 사망한 작가의 작품을 분석해 작풍을 흉내낸 ‘속편’을 만드는 것도 가능할 전망이다. (AI 창작물 저작권은 누구에게?)
서재의 큰 책장에는 라벨을 붙인 가제본 책들이 가득 차 있었다. 739권. 인공지능 작가 ‘손오공’이 지난 석 달 동안 써낸 미발표 신작이었다. 옆의 작은 책장에는 오대박 작가 본인이 지난 20년 동안 쓴 글들이 꽂혀 있었다. 밀리언셀러 5권을 포함한 소설 14권과 두꺼운 3공파일 47개. 파일에는 평생 꾸준히 쓴 일기와 작가노트, 블로그 글, sns 메시지, 자잘한 칼럼, 문화센터 강의계획서 등등 오대박의 모든 잡문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이제 이 모든 것들로부터 달아날 작정이었다.
그가 방황하기 시작한 건 작년 이맘때였다. 전에도 여러 번 슬럼프를 겪었지만, 그에게는 오래된 극복 노하우가 있었다. 자기 책을 빠르게 타이핑하기. 오래전에 쓴 책을 그대로 베끼다 보면, ‘이 부분은 이렇게 쓸걸’, ‘이 장면에선 이런 에피소드를 썼어야 하는데’ 따위의 생각이 문득문득 솟다가 마침내 새로운 착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착상을 이리저리 굴리다 보면 점차 새 소설의 윤곽이 드러났고, 그러면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영감의 원천이었던 자전소설을 포함해 14권의 책을 모조리 타이핑하며 수많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냈지만, 그중 어느 것도 구체적인 소설이 되지 않았다. 이 소재로 결정하면 저 소재가 아까워 보였고, 저 소재로 쓰다 보면 이내 막혀버리고 말았다. 끈기와 산문정신이 사라져버린 것만 같았다. 명상도 해보고 요가도 해보고 ADHD 약까지 먹어 보았지만 별무소용이었다. 그동안 그가 얻은 거라고는 1000타에 가까운 타이핑 속도와 얄팍하고 잡다한 아이디어들, 혼돈과 절망뿐이었다.
미쳐버리기 전에 그만두고 인생을 즐기자, 라고 마음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여유로운 상황은 못 되었다. 이미 계약된 책들이 열 권 가까이였고, 담당 편집자들과의 관계도 복잡했다. 김 주간은 그를 은근히 무시하는 눈치였고, 박 편집장과는 한창 썸을 타던 중이었으며, 송 대표는 발 넓고 입 싼 대학 선배였다. 계약을 파기하자는 말은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절대 꺼낼 수 없었다. 뿐인가? 몹시 진부하지만 그에게는 허구한 날 사업을 말아먹는 아버지와 병약한 어머니, 미국 유학 중인 막둥이 동생도 있었다.
바로 그 무렵, 이 박사의 제안을 받은 것이다.
이 박사가 평생을 바쳐 개발한 손오공은 특정 작가의 후속작을 창작하는 프로그램으로, 지금까지 쓴 모든 글을 입력하면 앞으로 쓸 수 있는 모든 글을 자동으로 생성할 수 있다고 했다. 오대박은 지금까지 치명멜로물을 써본 적이 없지만, 손오공은 오대박의 지난 인생을 토대로 오대박 스타일의 치명멜로물을 재깍 뱉어낼 수 있다. ‘이러저러한 실연’이나 ‘물리학 박사과정’ 따위의 새로운 경험을 업데이트하면 그로 인해 변화하고 성장한 ‘오대박 ver.2'의 신작을 써낼 수도 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일기나 작가노트 등 사적인 기록을 넘겨야 한다는 게 꺼림칙했다. 유명작가의 사생활을 캐내려는 찌라시 기자가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였다. 진짜 과학자라 하더라도 프로젝트가 성과를 내면 당연히 학계며 언론에 발표할 테고, 오대박의 신작이 직접 쓴 게 아니라 컴퓨터가 만든 작품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의 명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었다.
“그게 왜 타격이라고 생각하시죠?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책도 더 잘 팔리지 않을까요?”
“많이 팔린다고 다가 아니죠. 신기한 것도 하루이틀이고, 사람들은 불로소득에 민감하잖습니까. 처음에야 호기심으로 책을 사볼 수도 있겠지만 나중엔 외면하지 않을까요?”
“나중에 외면받을 위험이야 모든 작가가 지고 있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재미있는 책은 팔리게 마련입니다. 작가님의 필력에 손오공의 능력이 더해지면 ‘실제로 재미있는’ 책이 만들어질 겁니다. 작가님이 혼자 썼든, 컴퓨터와 함께 썼든,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손오공이 만들어낼 작품은 어디까지나 작가님 본인의 경험과 개성을 토대로 한 건데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접니까?”
“슬럼프를 겪고 계셨으니까요. 그리고 일기와 작가노트를 성실히 쓰는 타입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출간된 작품이 많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작가 본인의 사적인 경험과 욕망, 평소의 생각과 감정 패턴을 최대한 자세히 입력해야 작가의 무의식과 미래 가능성까지 분석해낼 수 있으니까요. 또한 작가님은 베스트셀러 작가 아닙니까. 인세를 적당히 배분한다면 저희로서도 안정적으로 연구비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정 내키지 않으신다면 저희로서도 어쩔 수 없죠. 다른 분께 제의를 드릴 수밖에요.”
“……”
“저라면 한번 해볼 겁니다. 작가로서 자신이 어떤 가능성들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어찌어찌 이번 슬럼프를 이겨낸다고 해도, 지금 같은 속도라면 앞으로 평생 20권 이상 써내기 힘들 겁니다. 하지만 우리 프로젝트에 함께하면 엄청나게 많은 발상들을 작가님다운 형태와 내용으로 실현할 수 있습니다. 손오공이 털뭉치를 훅 불어 수많은 손오공들을 만들듯이 말이죠. 게다가 이건 단순한 자기복제가 아닙니다. 이 프로그램은 학습하고 변화할 능력까지 갖추고 있으니까요. 작가님의 모든 가능성을 실현함으로써 작가님은 자신에 대해 더욱 잘 알게 될 겁니다. 자신이 어떤 씨앗들을 품고 있으며 그 모든 씨앗의 모든 열매는 어떤 모습인지, 남김없이 알게 될 거란 말입니다. 아마 앞으로는 이런 방식이 보편화되겠죠. 최초 대상자가 되어 과학사와 문학사에 이름을 남길지, 뒤늦게 유행을 따르는 사람이 될지는 작가님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7대 3이면 됩니까?”
결국 그는 14권의 책과 47개의 파일을 모두 넘겼다. 물론 저작권 침해와 사생활 유출을 막기 위한 암호화 및 비밀유지 서약을 거친 뒤였다. 이 박사는 사기꾼이 아니었고, 손오공은 완벽에 가까운 프로그램이었으며, 지칠 줄도 몰랐고 멈출 줄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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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공은 몰두해서 계속 써나갔다.
오대박은 손오공이 실현한 자신의 가능성을 미처 다 읽어낼 수도 없었다. 이 박사는 그중 한 권을 골라 하루빨리 첫 작품을 출간하자고 성화였지만 그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했다. 컴퓨터가 전광석화처럼 소설을 쓰는 동안,
그는 느릿느릿 짐을 꾸렸다.
739권의 표지 없는 책들을 보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이게 내 전부일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손오공이 써냈거나 써낼 것과는 완전히 다른, 손오공이 그 방대한 데이터로도 조합해낼 수 없는 무언가를 쓰고 싶어졌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손오공이 전혀 알지 못하는 경험과 생각을 해야만 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 했다. 어디로 갈까, 손오공이 따라올 수 없는 그 어딘가가 존재할까, 지금 내가 떠나는 건 도망일까 모험일까,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는 집을 나섰다.
구름이 낮게 드리운 잔뜩 찌푸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