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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주말과 <소셜 딜레마>

적당히 살고 싶어서, 오늘은 아날로그 (11)

by 이제

직장에서 또 사건이 벌어졌다. 업무폭탄을 맞고 일주일 내내 자정 가까이 야근을 한 뒤, 토요일은 모든 자제력을 내려놓고 종일 집에 처박혀 핸드폰만 봤다. 웃긴 영상을 보면서 실실 웃다가, 직장인 커뮤니티의 글들을 보며 감정이입하다가, 드라마를 몰아 보며 맵고 짜고 기름진 배달음식을 실컷 먹고는 뒤늦게 후회하며 유튜브에서 마음챙김 영상을 찾아보는 등 하루종일 화면만 붙잡고 있었다. 그나마 내가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술까지 마셨다면 스트레스에 숙취까지 겹쳐 더 고생했을 테니까. 두통은 질색이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제프 올롭스키)는 빅테크 기업의 알고리즘이 어떻게 사람들의 관심을 이용하는지 보여준다. 알고리즘의 목적은 사람들의 눈길을 최대한 더 많이 더 오래 붙잡아 두고(“인생의 몇 퍼센트나 우리에게 바치게 할까?”), 광고주들의 제품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해 광고수익을 얻는 것이다. 이들 기업은 우리의 시간과 통제력을 빼앗기 위해 고도의 전문인력과 기술·자본을 투입한다. 앱 디자인에 도박 게임의 요소를 집어넣고, 이용자의 온라인 활동을 데이터로 축적·분석해 앞으로의 관심과 행동을 예측하고, 광고주들의 상품을 사고 싶은 욕망을 일으킨다.


알고리즘에게 이용자의 삶 따위는 중요치 않다. 뭘 보여줘야 그 사람의 눈길을 끌지, 오직 그것만을 계산할 뿐이다. ‘이 사람 봐라? 일주일 동안 핸드폰을 안 보겠다고 결심했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겠군. 전 여친에게 새 남친이 생겼다는 SNS알림을 띄우자! 이건 못 참겠지!’라든가, ‘이 사람, 오늘 화가 많이 났군. 성향을 분석해보니 음모론을 잘 믿겠는걸? 자극적인 가짜뉴스를 보여주면 푹 빠져들겠어!’라는 식으로 말이다. <소셜 딜레마>는 평범했던 학생이 알고리즘을 통해 음모론을 접하고, 끝내 폭동 가담자가 되는 과정을 재현하며 소셜미디어의 위험성을 경고한다(그때만 해도 남의 나라 얘기인 줄 알았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나에게 광고란 길가 현수막 같은 존재였다. 대부분 무심코 지나치지만 가끔은 힐끗 쳐다보는, 심심하거나 관심이 가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배경소품이었던 것이다. 때로는 광고를 작품으로서 즐기기도 했다. 일부러 칸 라이언즈 수상작 상영회에 가서 세계 각국의 신박한 광고들을 극장화면으로 본 적도 있다.


하지만 요즘의 광고는 다르다. 스마트폰에 빠져 있을 때, 나는 내 갈 길을 내 발로 가는 게 아니라 알고리즘이 운전하는 택시를 타고 끝없이 드라이브만 하는 상태가 된다. 내가 행선지를 지시하는 것 같지만(내가 볼 콘텐츠를 내가 선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기사가 교묘하게 나를 몰고 다니며 내가 혹할 만한 상품들 앞으로 안내한다. 어떻게든 내가 택시에서 내리지 않도록, 더 많은 광고를 보고 더 충동적인 소비자가 되도록 유도해야 광고주들에게서 더 많은 돈을 받을 테니까. 내가 택시에 처박혀 점점 환자가 되어가든, 내 삶의 더 중요한 문제를 외면하고 현실세계의 즐거움을 잃든, 인공지능 택시기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계속 더더욱 그렇게 되라고 부추긴다.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소셜 딜레마>는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를 촉구한다(디지털 프라이버시 보장, 데이터 수집에 세금 부과, 시장 불법화 등). 개인 차원에서는 알림 끄기, 알고리즘 추천 기능 끄기, 소셜미디어 앱 삭제, 팩트체크, 낚시성 게시물 클릭하지 않기(“너무 감정에 호소하게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면 그 생각이 맞을 것이다”), 나와 관점이 다른 의견을 접하기, 침실에서 전자기기 제거, 고등학생까지 소셜미디어 금지 등을 권한다.




……이런 다큐멘터리를 불과 며칠 전에 봤는데도 이 분노의 토요일에는 스마트폰에 저항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빅테크 기업이 바라는 대로 온종일 누워서 스마트폰을 보고, 자극적인 메뉴를 잇따라 개발하는 프랜차이즈 외식기업이 바라는 대로 비싼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다. 모든 유혹은 스트레스 상황에 놓인 사람을 특히 좋아하지 않을까? 내가 괴롭고 약해질수록 이 기업들에는 이득이 되는 것이다.


직장인이 주말에 누워서 핸드폰 좀 보고 배달음식 좀 먹는 게 뭐 어떻냐고도 생각해봤다. 모든 일이 그렇듯 적당하면 괜찮다. 나도 스마트폰을 아예 끊을 생각은 없으며, 6개 OTT를 구독 중이고, 영화·드라마·예능 등의 영상 콘텐츠는 내 평생친구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루에 14시간 동안 화면만 들여다보는 게 과연 정말 내가 원하는 생활일까? 어쩌면 단순히 ‘멈출 수가 없어서’ 끌려다닌 건 아닐까? 나 개인의 의지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이 시스템이 ‘멈추지 못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밤이 되자 슬슬 화면과 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졌고, 계속 손가락을 움직이며 이 앱 저 앱 방랑하기도 피곤해졌다. 내일까지 이렇게 누워서 화면만 들여다봤다가는 분명 두통이 올 것 같았다. 정신줄을 붙잡고 다음 날인 일요일은 아날로그 휴일로 보내기로 했다. 오늘은 오늘이고 내일은 내일이다. 내일 하루만큼은 고요하고 한가로운 하루를 보내며 힐링해야지.


다음 날은 실컷 늦잠을 잤다. 11시쯤 잠이 깨자마자 힐링은 무슨? 회사에서 있었던 사건이 어김없이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분노의 일기를 쓰고 분노의 피아노를 마구 두들겼다.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을 종이와 건반에 쏟아놓으니 풍선에서 바람을 뺀 듯 마음이 좀 편해졌다. 따뜻한 물로 샤워까지 한 뒤에는 분노의 굴레에서 웬만큼 풀려났다. 아날로그 휴일이 아니었다면 일기, 피아노, 샤워 같은 방법은 떠오르지도 않았을 거다. 떠올랐다 해도 전혀 의욕이 생기지 않았을 거다.


어느새 나는 일기장에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봄부터 브런치 연재를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20주 동안 20편의 글을 연재한 뒤 상반기 동안 책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퇴직하자마자 출판사 등록을 해서 책을 내기로 결심했다. 결심하고 계획하며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다보니 기분이 좀 더 나아졌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결심은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이때로부터 1년 가까이 지난 뒤에야 브런치를 다시 시작했고, 출판사 등록도 책 완성도 아직이다. 하지만 또 지키지 못할 결심을 했다고, 지킬 노력이 부족했다고 나를 탓하지는 않는다. 그때 내 마음에는 그런 결심이라도 필요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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