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마지막 퇴근은 공항으로

<번외> 적당히 살고 싶어서, 오늘은 퇴사여행

by 이제

내게는 오랜 로망이 하나 있었다. 퇴사 날 퇴근길에 곧장 여행 떠나기! 짐 정리는 미리 해두고 마지막 날은 가뿐하게 캐리어를 끌고 출근한다. 마지막 근무를 마치면 직원들과 인사를 나눈 뒤 직장 건물을 나서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여행지로 직진한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이라며 하늘로 날아가는 만화 주인공처럼,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 던지고 자유를 찾아 저 멀리 탈출하는 거다.


5aELIdmIbSuUGuiWwAQuWG.jpg


지금이 바로 그 소원을 이룰 때였다. 막연한 공상 같았던 꿈을 진짜로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퇴사 날이 정해지자 본격적인 고민에 빠졌다. 어디로 갈까? 강원도나 부산? 제주도에 장기 숙소를 잡을까? 템플스테이를 길게 가볼까? 모두 좋은 선택지였지만 이번에는 더 낯선 곳으로 가고 싶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다른 일상을 살아보고 싶었다.


그렇다면 역시 해외일까?


태어나서 한 번도 다른 나라에 가본 적이 없었다. 비행기도 딱 한 번,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제주행 국내선을 타봤을 뿐이다. 시간이 있을 땐 돈이 없었고, 돈이 있을 땐 시간이 없었고, 드물게 돈과 시간이 생겨도 용기가 없었다. 코로나 사태가 터졌을 때는 이대로 평생 이 나라를 못 나가보려나 싶었다. 그런데 이제 모든 조건이 갖춰졌다. 돈도 시간도 의욕도 있다. 전염병이 창궐해 출국이 금지되지도 않았다. 그 무엇도 나를 가로막지 않는다. 이런 절호의 기회라니!


마침내 나는 생애 첫 해외여행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그것도 혼자, 최소 일주일 이상 길게 떠나기로 했다. 누구와 함께 가거나 패키지 여행에 합류하는 선택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여행의 모든 절차를 스스로 처리해보고 싶었다. 짜여진 일정을 허겁지겁 쫓아다니는 일은 직장에서 할 만큼 했으니 이번 여행만큼은 자유롭게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사실 좀 무섭긴 했다.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나지 않을까, 숙소 침대에서 빈대가 나오지 않을까, 음식을 잘못 먹어 탈이 나지 않을까, 소매치기나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을까, 누군가가 사탕으로 위장한 마약을 건네주지 않을까, 밤길에 납치당해 거액의 몸값을 요구받지 않을까, 영화 <집으로 가는 길>처럼 범죄에 휘말려 말도 안 통하는 타국에서 수년간 옥살이를…… 등등등 미디어로 접한 무시무시한 장면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하지만 내 생각에도 대부분은 터무니없는 공상이었다. 걱정보다는 기대에 초점을 맞추고 상비약이나 잘 챙겨 가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느 나라를 가느냐였다. 고려한 조건은 대략 이랬다.

1. 안전하고 여행 인프라가 웬만큼 갖춰져 있으면 좋겠다. 처음, 그것도 혼자 여행인 데다 휴식의 목적도 있었으므로 가급적 쉬운 여행지가 좋을 듯했다.

2. 언어가 낯설었으면 좋겠다. 거리의 간판과 표지판, 들려오는 말소리가 색다를수록 타국에 있다는 실감이 날 것 같아서다. 그런 차원에서 한자나 영어를 쓰는 나라는 제외했다.

3. 멋진 자연에 럭셔리 리조트 위주의 휴양지보다는, 사람 사는 동네답게 활기찬 지역이었으면 좋겠다. 우리와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처음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일주일쯤 지내며 클래식한 분위기를 즐겨볼까 했지만 막상 백만 원이 훌쩍 넘는 항공권을 결제하자니 손이 달달 떨렸다. 처음부터 너무 먼 유럽까지 가기가 겁나기도 했다. 약간의 적금이 있다고는 해도 앞으로 먹고살 생활비이고, 언제 다시 소득이 생길지도 기약이 없다. 비용이 한정된 만큼 ‘돈이 덜 드는 곳에 오래 머무르기’, ‘돈이 많이 드는 곳에 잠깐 다녀오기’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아야 했다. 세계 곳곳의 도시들을 하염없이 검색하며 몇날며칠을 고민했다.


고심 끝에 결정한 곳은 베트남 다낭이었다. 치안도 좋은 편이고 물가도 저렴하며 택시·배달 시스템이 잘 갖춰져 여행이 편리하다고 했다. ‘경기도 다낭시’라고 부를 만큼 한국인이 흔히 찾는 곳이란다. 한국 관광객이 너무 많아 그냥 한국 같다는 평도 있었지만 엄연히 언어와 기후와 문화가 다르니 이국적인 느낌은 충분할 것 같았다. 여기서 보름 동안 유유자적하기로 했다.


퇴사 통보 하나만으로도 충격이 컸을 부모님은 첫 해외여행을 혼자 가겠다는 말에 더더욱 당황하셨다. 어디 외국을 혼자 가냐며 동생이라도 데리고 가라고 성화였다. 그러나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퇴직 후 책을 쓰고 출판사를 차리겠다는 꿈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일단 지금은 지금의 꿈을 이루고 싶었다. 이토록 홀가분한 여행은 평생에 한 번 경험하기도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내 소망대로 다시는 직장이라는 곳에 다니지 않을 수 있다면 퇴사여행의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해외여행을 준비해보니 이것도 일종의 프로젝트였다. 행사를 준비하는 실무자처럼 필요한 정보를 찾아가며 절차에 따라 다양한 과업을 하나하나 처리해야 했다. 여권을 신청하고 항공권을 예매하고 숙소를 예약하고 여행자보험에 가입하고 유심을 사고 트래블카드를 만들고 환전을 하는 등의 모든 일이 처음이었다. 어느 날은 점심시간에 항공권을 검색하다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옆 직원에게 물었다.


“저기, 하나만 여쭤봐도 되나요? 인천에서 다낭까지 다섯 시간이 걸린다는데 왜 8시에 출발해서 11시에 도착한다고 돼 있을까요?”

“아, 시차 때문에……”

“아악!”


그랬다. 내가 살아가는 지구에 시차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걸 실제로 경험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퇴사 직전 단골 영화관에서 <쇼생크 탈출>을 재개봉했다. 주인공이 탈옥하는 영화로만 알았는데 막상 보니 탈옥이 다가 아니었다. 탈옥 전까지 20년 동안 오직 탈옥만을 위해 살아간 게 아니라는 점이 더 감동이었다. 주 의회에 줄기차게 편지를 보내 도서관 예산을 받아내고는 “6년밖에 안 걸렸네요. 이제 두 통씩 보낼 거예요!”라고 말하던 앤디. 방송실을 점거해 ‘피가로의 결혼’을 전체방송으로 틀어제끼고는 간수들이 문을 부수는 동안 안락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음악을 듣던 앤디. 그러면서도 탈출을 포기하지 않고 20년 동안 땅굴을 파서 마침내 결행하다니, 이렇게 멋질 수가!


‘나는 희망한다’는 명대사와 함께 새파란 바다가 펼쳐지자 감동이 휘몰아쳤다. 퇴사와 출국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이거라니 기분이 끝내줬다. 내 상황을 탈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좀 더 미래가 희망차게 느껴졌다.




드디어 대망의 그날이 왔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마지막 순간까지 짐을 풀었다 닫았다 하다가 9시 직전에 출근했다. 캐리어뿐만 아니라 헐렁한 체크셔츠에 겨자색 반바지로 완연한 여행자 차림이었다. 업무 인수인계는 끝냈으므로 여기저기 인사를 다니며 하루를 보냈다.


마침내 동료직원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며 마지막으로 사무실 문을 나섰다. 캐리어를 덜덜 끌며 익숙한 복도를 마지막으로 걸어 나와 익숙한 엘리베이터를 마지막으로 탔다. 마지막으로 건물을 나서자 드디어 진짜 해방이었다. 다사다난했던 5년이 등뒤에 있었다. 회사 건물 앞에서 기념셀카를 한 장 찍고 공항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곧 버스가 왔다. 캐리어를 짐칸에 싣고 가벼운 몸으로 널찍한 좌석에 앉았다. 드디어 버스가 출발하자, 세상에! 너무 설렜다! 너무 신났다! 너무 행복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게 이런 거였나? 고생을 이겨내면 성공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고생이 클수록 그 고생이 끝날 때 더 기쁘다는 의미였던가? 퇴사 후 번아웃 후유증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오히려 우울해지는 경우도 많다지만 나는 철이 없어서인지 그저 좋기만 했다. 이 지긋지긋한 직장을 탈출해 비행기를 타고 멀리 날아가는 거다! 와우! 아싸! 야호!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한강을 따라 서쪽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이토록 거대하고 확실한 행복이라니.


20240612_194430.jpg



다음 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액셀과 브레이크를 둘 다 꽉 밟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