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글쓰기

by 이제

16. 11. 20

저는 하루에 딱 한 장만 글을 쓰는 직장인입니다. A4 한 장이냐고요? 아뇨, 200자 원고지로요.

하루에 200자는 딱 부담 없는 분량이랍니다. 쓰는 데 한 시간도 안 걸리니까요. 한 시간이 뭐예요, 10분 만에 쓸 때도 있어요. 퇴근길에 잠깐 카페에 들러, 늦잠 자고 일어난 주말 오전에, 노트북으로 예닐곱 문장 정도 토독토독 두드리는 거죠. 참 쉽죠?


16. 11. 21

저는 어디까지나 취미로 쓰는 사람이니까, 무리한 계획 따윈 세우지 않아요. 글이 잘 풀리는 날에도 절대 두 장은 쓰지 않죠. 그래야 페이스가 유지되거든요. 잘 써진다고 열 장을 내리 쓴 적이 있었는데, 왠지 기가 빨려서 다음 날은 쓰기가 싫어지더라고요. 더 빨리, 더 많이 쓰고 싶어서 욕심이 나기도 하고. 그래서 그 다음부턴 절대 200자를 넘기지 않아요.


16. 11. 22

그날 쓴 원고는 직접 제작한 A5크기 원고지에 손글씨로 깨끗이 적어 둡니다. 점점 두껍게 쌓여가는 걸 보면 어찌나 뿌듯한지. 하루에 200자가 적어 보이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쓰면 책도 낼 수 있더라고요. 제가 지금 직장생활 6년찬데, 그동안 직장 에세이 <신입사원 미선 씨>, 연애소설 <안녕, 하나> 두 권을 출간했어요. 많이 팔리진 않지만 괜찮아요.


16. 11. 23

처음부터 책 팔아서 큰돈 벌 생각은 없었답니다. 생업은 따로 있는 게 맞죠. 지금 다니는 회사, 힘들고 지겹지만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뭐 연봉도 나쁘지 않고. 물론 요즘 세상에 평생직업은 없지만, 나중에 잘려도 전업작가는 안 할 거예요. 지금 쓰고 있는 <직장인의 글쓰기>를 스펙삼아 글쓰기 강의를 하거나 자비출판 사업을 해볼까 싶어요.


16. 11. 24

물론 다른 가능성도 얼마든지 열어두고 있고요. 그때를 위해 차근차근 돈도 모으고 공부도 해나가고 있답니다. 그것도 역시 200자 글쓰기처럼 천천히,조금씩요.

이렇게 저는 하루하루 보람차고 희망찬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큰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슬럼프 따윈 오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글쓰기는 어디까지나 힐링이고 놀이고 휴식이어야 하죠.


16. 11. 25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 그러면서도 매일 잠깐씩은 작가가 되어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 저는 그런 생활에 충분히 만족해요. 예술에 인생을 건다든지, 글 써서 먹고살겠다든지, 그런 무모한 생각을 했다가는 인생 말리기 십상이더라고요. 바로 우리 언니처럼요.

언니는 일주일째 깊은 좌절에 빠져 있습니다. 은종을 잃어버려서라나요.


16. 11. 26

언니는 3년 전에 등단하고도 책 한 권 못 낸 무명 소설가인데, 별난 습관이 하나 있었어요. 작업하기 전에 경건한 마음으로 은종을 딸랑, 울리고는 무조건 A4 3쪽을 써내려가는 거였죠. 3쪽을 채우기 전엔 절대 쉬지 않고요. 뭘 그렇게 종까지 울려 가며 심각하게 쓰는지 알 수 없지만, 언니한테는 뭐 글쓰기가 인생의 전부라니까요.

그 은종이 희귀한 물건이긴 해요.


16. 11. 27

종 겉면에 글을 쓰는 성직자의 모습이 새겨져 있거든요. 소주잔 크기의 작은 종인데도 어찌나 섬세한지, 손에 들고 있는 펜 모양까지도 보인다니까요. 3년 전 언니 혼자 키차야 여행을 갔다가, 도착한 첫날 골동품 가게에서 우연히 발견했대요. 바로 여행비를 다 털어 질러버렸다더군요. 물론 순은이었다면 그 정도로도 못 샀겠죠. 은빛이라서 은종이라고 부르지만,


16. 11. 28

진짜 은은 거의 안 들어 있을 거예요, 아마. 하여간 첫날부터 돈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돌아오는 날까지 숙소에 처박혀 글만 썼다더라고요. 숙소에서 무료제공하는 식빵이랑 계란만 주구장창 먹으면서요.

그런데 언니는 그 열흘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언니, 그때 쓴 글로 등단했잖아요. 그러니 그 종을 얼마나 애지중지하겠어요.


16. 11. 29

저로서는 이해가 안 될 뿐이에요. 종 하나 사고 열흘 내내 글만 쓸 거면 왜 굳이 카차야까지 비행기 타고 간 거냐고요. 차라리 황학동을 가지. 그리고 작가라는 사람이 종 하나 없어졌다고 글을 못 쓰는 게 말이 됩니까? 언니가 아니라 종이 글을 쓴 꼴이잖아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글 좀 안 써지면 인생 끝나나요? 저렇게 열흘이 넘도록 자식 찾듯이 찾아다닐 일이냐고요.


16. 11. 30

그냥 평범한 직장 잡고 취미로 조금씩만 쓰면 될 것을. 바보같은 언니.

하긴 이제 나이 때문에 취직도 어려운가보더라고요. 방송작가 1년 하고 때려치운 게 사회 경력 전부예요. 앞으로 어떻게 험난한 인생 살아갈지 참……. 자격지심 때문인지 성격도 점점 쭈굴쭈굴해지더라고요. 저도 책 낼 때마다 언니 눈치를 얼마나 봤다고요. 결국 지금은 좀 어색한 사이가 돼버렸네요.


16. 12. 1

어렸을 적에는 언니와 제법 친했답니다. 둘 다 문학소녀였고, 글쓰기를 좋아했죠. 중학교 땐 둘이서 교환소설을 쓴 적도 있어요. 당시에 어떤 아이돌 그룹을 똑같이 좋아했거든요. 각자 가장 좋아하는 멤버를 주인공으로 해서 팬픽을 썼었죠. 물론 지금은 차마 눈 뜨고 못 볼 수준이지만.

솔직히 글은 언니가 더 잘 썼어요. 눈 뜨고 못 볼 그 소설도,


16. 12. 2

눈을 반만 뜨고 잘 살펴보면 언니가 쓴 부분이 더 생생하고 매력적이죠. 그래서 나는 재능이 없나보다 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취직한 건데, 인생이 이렇게 풀릴 줄이야 알았나요.

사실 저는 그 종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답니다. 일곱 살 먹은 조카가 크리스마스 트리 한구석에 매달아뒀죠. 딱 조카 눈높이 어디쯤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조카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16. 12. 3

걔한테야 언니의 은종도 다른 장식품들이랑 똑같아 보였겠죠. 아닌 게 아니라 비슷한 장식품을 하도 많이 달아놔서 은종 따윈 잘 뵈지도 않아요.

그랬을 줄이야 상상도 못 하는 언니는, 휘황찬란한 트리 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네요. 자기 방을 뒤집어 엎고, 지하철 분실물센터를 매일같이 들락거리면서도 말이에요.

그렇지만 저는 말해주지 않을 거예요.


16. 12. 4

언니 인생을 위해서죠. 작가라면 종 따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 글을 쓸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아니면 아예 때려치우고, 이젠 좀 사람답게 살아보든가요. 다가오는 설에는 부모님 용돈도 좀 챙겨드리면서요.

언니는 과연 중단된 그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이번 마감만 넘기면 드디어 소설집 한 권 분량이 된다던데, 다가오는 새해에는 첫 책이 나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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