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살던 시대에는 ‘지망생’이라는 단어가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가수지망생이었다. 아이돌이 되기 위해 소속사에서 몇 년을 굴렀지만 데뷔를 못 했단다. 결국 꿈을 포기하고 산전수전 다 겪은 끝에 말년에는 조촐한 코인노래방 하나를 차리셨다. 비좁은 룸 하나를 차지하고 흘러간 옛 노래 <뱅뱅뱅>을 부르던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 그리운 우리 할아버지.
어릴 적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가수지망생이랑 가수는 뭐가 다른데요?”
“가수지망생은 데뷔를 못 한 사람이고, 진짜 가수는 데뷔를 한 사람이지.”
“데뷔가 뭔데요?”
“앨범을 내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거야. 그게 바로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란다. 노래 불러서 돈을 벌어야 가수지. 돈 못 벌면 지망생이고.”
“엥?”
할아버지 시대에 돈이 최고였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가수와 가수 아닌 사람조차 돈으로 구분했을 줄이야.
옆집 철수 아저씨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아저씨는 솔직히 노래를 그리 잘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의 다른 모든 일보다 노래를 좋아하니까 노래를 부르며 사는 거고, 철수 아저씨가 가수 아니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동네 음악회나 중고등학교 축제 때면 아저씨는 종종 찬조공연을 한다. 가끔 삑사리도 나고 박자도 틀리지만, 어차피 다들 큰 소리로 따라 부르기 때문에 삑사리 따위 들리지도 않는다.
아랫집 영희 언니도 그렇다. 언니는 시인이지만 아무도 언니 시를 읽어본 사람이 없다. 언니는 평생 동안 좋은 시 딱 100편만 써서 죽기 전에 시집 한 권을 내는 게 꿈이라고 한다. 그 시집 내용이 궁금해서라도 나는 꼭 언니보다 오래 살아야 된다. 나도 사람이고 질풍노도 시기의 청소년인지라 가끔은 확 그냥 죽어버릴까 싶을 때가 없는 건 아니지만, ‘영희 언니 시집!’만 생각하면 정신이 확 드는 것이다. 읽어본 적도 없는 시가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니, 참.
나는 작년 이맘때, 그러니까 열일곱 살 때 작가가 되었다. 짧은 SF소설을 써서 블로그에 올린 게 데뷔라면 데뷔였다. 그날 바로 네트워크센터에 예술인 등록을 했고, 다달이 창작지원금을 받기 시작했다. 창작지원금은 기본소득과는 별도로 예술활동에 필요한 만큼 지급된다. 나야 뭐 딱히 큰돈이 들지는 않지만, 비싼 악기를 연주하거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꽤 요긴하다고 들었다. 돈이 없어서 예술을 못 하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의 노동을 컴퓨터와 기계에 맡긴 지금,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적극 장려되기 때문이다.
지역마다 하나씩 있는 네트워크센터는 사람들이 마음껏 예술활동을 하고, 학문을 연구하고, 모임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다. 센터의 포털에 프로필을 등록해 두면 내 재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연락을 해 온다. 최근에 업데이트한 내 프로필은 이렇다.
이름: 나소설
직업: SF작가, 고등학교 휴학생
이력: 단편 SF 20여 편, 첫 단편동화 집필 중, 학교 매거진 편집장
재능: 글쓰기, 비밀 얘기 듣고 비밀 꼭 지키기, 취향 맞춰 선물 고르기, 괴물 모양 쿠키 만들기, 동화책 실감 나게 읽기, 우리 동네 맛집 안내, 줄넘기 2단 뛰기
희망: 작품집 출간, 내 책 번역서 출간, 인공언어 만들기
작년에 고등학교를 휴학한 뒤로는 네트워크센터에서 살다시피 했다. 대학 캠퍼스를 리모델링한 우리 지역 센터는 풍경도 예쁘고 문화공간도 많아서 날마다 가도 질리지 않았다.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기도 하고, 카페형 작업실에서 글을 쓰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한 꼬맹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다가 졸지에 기나긴 비밀 얘기까지 들어주기도 했다. 여덟 살 어린이의 비밀치고는 꽤 충격적인 내용이었지만, 나는 비밀을 잘 지키니까 말하지 않기로 한다.
그렇게 소소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안녕하세요, 나소설 작가님이시죠? 취미번역동호회 김윤정이라고 합니다. 프로필 보고 연락드렸는데요.”
윤정 씨는 내 프로필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며, 이 지역 십대 작가들의 단편소설을 영어로 번역해 작품집으로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소규모 출판이긴 하지만 작업 자체만으로도 재미있지 않겠냐고, 벌써 동호회 회원들의 동의도 받아냈다는 것이다.
프로필에 적었듯, 내 꿈은 언젠가 내 책이 번역출간되는 것이었다. 정확도 98%의 인공지능 번역프로그램이 있지만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문학적 번역은 여전히 인간만이 가능하다. 사람의 손으로 작품이 번역된다는 건 작가로서 대단한 영예에 속했다. 그 꿈이 벌써 이뤄질 줄이야!
물론 이건 시작일 뿐이고, 좋은 작가가 되려면 갈 길이 멀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 길 자체가 이토록 신나고 흥미진진하다면, 거리 따위야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 이름은 이장수.
작가 장수생이다. 올해로 8수째.
예술인 등단루트의 일원화ㆍ표준화로 전국의 예술 지망생들이 죄다 고시생 신세가 되어버린 게 벌써 50년 전이다. 이제는 작가, 가수, 배우, 화가, 무용가, 연주자, 영화감독 등등 모든 분야의 예술인을 ‘컬쳐테인먼트 재단’에서 뽑는다. 1차 서류 및 포트폴리오, 2차 필기, 3차 실기, 4차 면접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뽑힌 ‘공인 예술인’은 7급 공무원 정도의 대우를 받으며 자유롭게 예술활동을 할 수 있다. 나 역시 공인 소설가가 되기 위해 8년째 죽을힘을 다하고 있는 중이다.
모집 정원은 분야별로 해마다 바뀌는데, 작년 소설가 티오는 4명이었다. 재작년에 비해 반절로 줄어든 것이다. 한국 소설이 세계시장에서 먹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티오를 확 줄여버렸다. 티오 발표 날이면 전국이 들썩거린다. “판소리 한 명이래, 나 어떡해……”, “자기계발서 작가는 더 늘었네? 와 진짜 팍팍 밀어준다” 같은 소리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비인기 분야의 티오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드물게 들리지만, ‘예산 부족’ 한마디면 간단히 꺾여버리고 만다. 인공지능이 책도 쓰고 연주도 하고 그림도 그리는 지금, 인간 예술가의 영역은 극히 협소해져버렸다.
그래서 난 8년째 작가지망생이다.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먹고사는 저소득 청년이기도 하다. 하긴 요즘 대부분의 일자리는 아르바이트다. 10여 년 전 실업률 80% 시대가 열리자, 정부는 어떻게든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삽질알바를 대폭 늘렸다. 가장 많은 일자리를 양산한 알바계의 노다지는 4대강이었다. 4대강 댐을 곡괭이와 손수레로 해체하는 일, 나룻배를 타고 녹조류를 걷어내는 일 등등에 엄청난 노동력이 투입되었다. 나 역시 거기서 돌깨나 날랐다. 그래도 난 운이 좋은 편이다. 그 일 하다가 물에 빠지거나 다친 사람도 많았는데, 이렇게 무사히 살아 나왔으니 말이다.
지금은 내 전공을 살려 댓글알바를 한다. 글 쓰는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다. 옛날에는 논술 강사라도 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스타강사들의 맞춤형 강의 프로그램이 시장을 장악해서 나 같은 장수생 따윈 머리카락 한 올 들이밀 수가 없다. 홍보글 자동 생성 프로그램이 개발된 이후 댓글알바 수요도 거의 사라질 뻔했지만, 이 업계엔 왠지 지원금이 많이 들어와 아직도 구시대적 작업방법을 고수할 수 있다고 한다. 돌 나를 때보다 몸은 편하지만, 하루 열 시간씩 댓글을 달며 손목 터널증후군으로 고생할 때면 내가 이러려고 작가지망생이 됐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하지만 생활비와 학원비를 벌려면 어떻게든 붙어 있을 수밖에 없다.
아무도 학원을 다니라고 강요하지 않지만, 합격자 중에 사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금수저들은 부모 돈으로 슬렁슬렁 놀면서 취미로 예술하고, 은수저들은 기숙형 스파르타 학원으로 가고, 동수저쯤 되면 주3회 2시간씩 일대일 과외를 받지만, 흙수저인 나는 온라인 단과 특강이나 겨우 수강하는 정도다. 기숙형 스파르타 학원에 들어가면 잠도 줄여 가며 하루종일 글만 쓰고 책만 읽는다는데, 그런 애들과 내가 과연 경쟁이 될까. 나이가 들수록 답답할 따름이다.
알바를 뛰고 필기시험 공부를 하느라 정작 내가 쓰고 싶은 글은 뒷전이다. 나는 한국어 소설을 쓰고 싶은데 시험 과목에 영어는 왜 들어 있는 걸까. 이제는 내가 왜 작가가 되려고 했는지 그 이유조차 가물가물하다.
차라리 꿈이 없는 게 나았을까. 작은 재능은 신의 저주라는 말을 매일 가슴에 새기는 나날이다.
* 참고: 소셜픽션 지금 세계는 무엇을 상상하고 있는가, 이원재, 어크로스
* p.s. 어떤 세상이었으면 최고은 작가가 죽지 않았을까, 라고 지난 6년 동안 생각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