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창을 열었지만 시작을 못 하고 있을 땐 아무 말이나 무작정 두드려보는 게 좋다.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카페에서 계속 재채기가 나와 눈치 보인다는 둥,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라는 둥 쓰잘데없는 소리를 잔뜩 쓰는 거다. 그러다 보면 쓸 만한 글감이 옆구리쯤에서 슬쩍 튀어나오곤 한다.
요즘 읽는 『교단X』에, 몸은 죽어도 의식은 죽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 흔한 발상이지만 새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여전히 난 <박쥐> 태주처럼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죽었는데도 내 의식이 남아 있거나, 삶과 죽음에 대한 엄청난 반전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그리고 그 반전을 모든 죽은 사람들이 똑같이 겪은 거였다면? 진짜 굉장하겠지!
그렇다면 과연 어떤 반전을 상상할 수 있을까? 어떤 반전이 나오면 가장 충격적일까? 인간의 삶 또는 우주의 존재 자체가 누군가의 놀이나 예술이나 실험이었다면? 일종의 테마파크 체험 프로그램이었다면? 진급을 위한 숙제, 수행, 실습이었다면? 이건 뭐 베르나르 베르베르냐고.
반전에도 스타일이 있다면, 내 스타일의 반전은……
오래 생각해봐야겠다. 흥미로운 주제다.
장편으로 쓰고픈 소재 세 가지를 콩트로 먼저 써보고, 가장 느낌이 오는 쪽으로 결정하기로 했다. 콩트들은 <시즌4: 소셜픽션>으로 연재할 생각이다. 어차피 내 소설은 다 소셜픽션이니까.
가장 먼저 쓸 얘기는 죽어서 가는 학교에 대한 것이다. 죽으면 연옥 같은 중간세계에 모여서 지난 삶에 대한 보고서 내지는 자기소개서를 써야 한다. 쓰고 나면 감독관이 검사해서 합격/불합격을 가린다. 불합격자는 합격할 때까지 학교에 남아 계속 써야 한다. 합격해서 학교를 나가면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기에 대한 많은 소문과 전설이 있다.
……라는 설정으로 써볼 생각이다. 물론 쓰다가 바뀔 수도 있다.
상당히 거대한 세계를 다루게 되지만 스케일 크다고 부담 가질 필요도, 이야기를 대하소설처럼 광범위하게 벌여 놓을 필요도 없다. 따지고 보면 모든 소설이 '우주 전체'라는 거대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 어떤 공간의 어떤 사람에 주목하는지가 다른 거다. 어떤 공간의 어떤 사람에 대해서만 잘 얘기하면 된다.
말이야 쉽지.
17. 4.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