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5. 27
토요일, 서울로 슈즈트리나 구경할까 하고 152번 버스를 탔다가 마음을 바꿔 종점까지 가버렸다. 언젠가 한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버스 종점 여행’.
종점은 멀었다. 몇 번이나 그만 내려버릴까 싶었지만 이번만은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서울 처음 와 보는 사람처럼 버스 창밖을 찰칵찰칵 찍어대며, 노량진을 지나 한강을 건너 서울역을 지나 을지로를 지나 동대문을 지나 보문을 지나 미아리를 지나 두 시간 만에야 종점인 혜화여고에 도착했다.
근처에 있다는 화계사에 가보기로 했다. 절로 올라가는 길목이라면 응당 파전집과 도토리묵집, 나무판 태워 글귀 새겨주는 기념품점 따위가 줄줄이 늘어서 있으려니 했는데(거의 20년 전 계룡산 소풍 때 형성된 이미지인 듯) 화계사는 관광지가 아니었다. 오르막조차 거의 없는 주택가 골목에 일주문이 있고 양옆에는 중학교와 동국대 기숙사(?)가 바싹 붙어 있었다.
별 대단한 의욕도 감흥도 없이, 한 시간쯤 경내를 산책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바라지 않는’ 데는 나도 꽤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나보다.
밖으로 나와 걷는데 파전집과 도토리묵집 대신 웬 핑크핑크한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주인 언니(언니가 아닐지도 모를……까?)가 구경하고 가라고 한다.
이틀 전 일기에 ‘쓸데없이 꿈은 있고 지랄’이라고 썼던 나자신이 무색할 만큼 꿈과 희망이 가득한 카페였다. 카페 이름마저 <그녀의 꿈>이었다. 문 연 지 이제 한 달이란다.
창가 자리에서 아무말이나 막 두드리고 있자니, 그렇게 손님이 창가에 앉아 노트북 하는 카페가 꿈이었단다. 일부러 그러라고 만든 자린데 한 달 내내 그런 사람이 없었다며. 나도 모르게 남의 꿈 하나를 이루어드렸다. 잘 자리 잡아서 오래오래 장사하시길.
돌아오는 길에는 152번 버스 말고 가장 빠른 경로를 선택했다. 먼저 수유역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탔는데, 버스 노선도를 보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유토피아가 강북구에 있었다니!
목적지는 수유역이었지만 굳이 유토피아 정류장에 내려보았다. 대체 어디가 유토피아인지 둘러보았으나 롯데시네마가 있는 겁나 높은 빌딩과 역시 겁나 높은 경마장 빌딩(???)이 시야를 압도할 뿐이었다. 하긴 우리 동네도 우리슈퍼 정류장에 GS25가 있긴 하다. (편의점이 동네슈퍼를 잠식해 가는 현 시대상이 고스란히 담긴 정류장 이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나름 강행군을 하고도 기어이 서울로에 들러 슈즈트리를 보고야 말았다. 무리수라는 말도 많지만 나는 원래 무리수를 사랑하니까.
신발에 심은 꽃들은 어쩐지 ‘멸망 이후’를 연상케 한다. 사람은 없고 꽃만 흐드러진 세상, 녹슨 철모를 비집고 나온 잡초 같은 분위기.
내 신발도 언젠가는 주인이 없어지겠지만, 발목이 있는 동안에는 많이 걸어보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