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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May 26. 2017

달팽이가 말을 한다면

17. 5. 25


책상 앞에 앉아는 있으나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럴 때면 종종 딴짓을 하는데 이번 딴짓은 ‘붓펜으로 낙서하기’였다.



이것저것 끄적이다 보니 어느새 달팽이를 잔뜩 그려놨다. 토미 웅거러의 『크릭터』를 보면 몸을 자유자재로 구부려 온갖 모양을 만들어내는 뱀이 나오는데, 이 달팽이도 그런 종류 같다.


종이 가득 싸이코 같은 낙서를 하다보면 (얼굴을 지고 다니는 달팽이들이 특히나 변태 같다)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닌 무념유상 유념무상의 상태가 된다. 그 무념유상 유념무상을 저 달팽이들이 말로 표현한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난 왜 자꾸 앞으로 나가서 남들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일까. 느려터져갖고는 가 봤자 얼마나 간다고. 앞으로 가지 않고, 앞으로 가겠다고 말도 하지 않았다면 아무런 기대도 실망도 받지 않았을 텐데. 그냥 달팽이집 속에서 안락하고 재미나게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소설을 쓴다느니 잡지를 만든다느니 하며 일만 벌여놓고 한심하게 낙서나 하고 있네. 근데 그 한심한 낙서가 바로 나네?’


아니, 달팽이들이 말을 할 줄 알았대도 저런 말은 입밖에 내지 않고 속으로만 생각했겠구나. 아무래도 저건 좀 쪽팔리니까.


나에 대해서 가장 큰 기대를 하는 사람은 바로 난데 나 자신에게 너무나 많은 실망을 안겨드려 송구스럽기 그지없다. 나는 지금까지 확 그냥 때려치워버릴까라는 생각을 엄청 많이 했는데 이제는 나조차도 그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는다. ‘흥, 니가 진짜로 때려치울 리가. ㅋ’ 뭐 이런 태도랄까?


하루종일 텔레비전 스마트폰만 봐도 늘 새롭고 짜릿할 수 있는 세상에서 쓸데없이 꿈은 있고 지랄이다. ……라고 써놓고 보니 꿈이라는 단어가 너무 건전하고 희망차 보여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꿈이 아니라 미련이라고 표현하면 좀 더 사실에 가까울까? 쓸데없이 미련만 있고 지랄이라고.


실컷 땅굴을 파고도 얼마 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실실 웃으며 쓰게 될 건 알지만, 지금 즐겁지 않은 것이 열정의 부족을 뜻하는 것 같아서 우울하다. 젠장 뭘 또 그렇게 열정적이어야 되는데?


하루빨리 주인공이 생생하게 느껴지기를 바랄 따름이다. 아직 이 녀석이 너무 멀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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