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지현 Jan 02. 2020

복숭아가 불쌍해요.

한국어 회화를 시작한 지, 6개월 정도 된 친구를 소개한다. 친구는 네 살 김유은 어린이로, 내 딸이다.

한국어 패치가 등록된 지 얼마 안 된 지라, 언어 예절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여러 해프닝이 발생한다. 데시벨 조절 문제로 귓속말로 할 얘기도 큰 소리로 말하며, 존댓말 기능의 부재로 친구, 엄마, 할머니, 선생님, 동네 아주머니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너’라고 말하는 미국식 언어를 구사한다. 이런 대화 후에 오는 민망한 공기는 엄마만 느끼는가 보다. 말을 할 수 있다는 유능 감에 가득 찬 어린이의 기세는 언제나 하늘을 찌를 듯하다.

     

유은 어린이의 언어 습관 중 가장 독특한 한 가지를 소개한다. 모든 사물을 의인화해서 말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음식물에 대한 것이다.

     

어젯밤, 저녁을 먹은 후 마룻바닥에 모여앉아 도란도란 복숭아를 깎아 먹고 있었다. 유은이는 평소처럼 작은 조각이 아닌, 엄마아빠처럼 큰 조각으로 달라고 했다. 큰 복숭아 조각을 뽀로로 포크에 콕 찍어서 주었더니, 만족스럽게 한 입을 베어 문다. 그리고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어떡해, 복숭아 어깨를 먹었허!”

복숭아 어깨? 동그란 복숭아 조각의 어디가 어깨인 건지, 나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나름 열심히 복숭아의 어깨 부위를 찾고 있는데, 연이어 다른 말이 날아왔다.

“복숭아 얼구이 없어졌어~ 어떡해~~~ 먹어버렸어~~”

이젠 복숭아의 신체 부위를 찾는 일은 포기하고 아이의 말을 받아주는 쪽으로 마음을 돌리기로 했다.

“어머~ 복숭아 어깨랑 얼굴이 없어? 어떻게 하지?”라고 받아주었다.

유은이는 “어떡해~ 내가 먹어버렸어~~”라고 동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복숭아가 불쌍하다며 금세 눈물이 글썽글썽(믿기 힘들겠지만 정말이다.)

네가 먹었잖니, 복숭아.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이의 동심을 생각해서 속으로만 말했다. 그렇게 촉촉한 마음으로 복숭아를 생각해주는 아이치고는 복숭아를 참 잘도 먹었다. 한 조각을 다 먹더니, 또 다른 조각을 받아들고는 다시 여러 신체 부위를 언급하며 한 입씩 베어 무는 것이다.

     

점점 똑똑해지고 있는 네 살 어린이는 의인화하여 말하기 방식을 필요에 따라 활용하는 영악함도 보인다. 특히, 밥 먹기 싫을 때 유용하게 쓰는 듯하다. “밥이 불쌍해요.”, “생선이 불쌍해요.” 등등. 불쌍하니 먹을 수 없다는 논리로 엄마를 설득하려 든다. 그리고 정반대의 경우에 활용하기도 한다.

     

어린이집 하원 길에 파리바게트에 갔던 날이었다. 빵과 함께 늘 먹던 흰 우유 대신, 이빨 썩는다고 잘 사주지 않는 까만색 초코우유를 사줬다. 달달한 초코우유를 마다할 아이가 있을까? 너무 맛있었는지 아껴먹던 초코우유는 빵을 다 먹은 후에도 유은이 손 안에 머물러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놓지 않던 초코우유는 결국 파리바게트에서부터 우리 집 까지 오는 길 약 1km를 함께 했다. 나보다 조금 앞서 가던 유은이가 휙 돌더니, 씨익 웃으며 하는 말.

“엄마, 쪼코우유 안에 쪼코가 나 좀 먹어죠~ 하고 있어요.”

초코우유는 안 불쌍하니.

이전 03화 눌러 쓴 원고지를 읽는 기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