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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현 Nov 08. 2021

눌러 쓴 원고지를 읽는 기분

엄마,  ?”

유은이의 부름에 뒤를 돌아보았다. 장롱 문을 열고 한 참을 바라보고 있던 참이었다. 계절이 바뀔 때쯤이면 발생하는 사태. 옷장에 옷은 있는데 왜 입을 옷은 없는 것인가, 의 늪에 빠져 있는 중이었다.

“응, 유은아 엄마 입을 옷이 없어서 생각하고 있어” 한숨을 내쉬며 답하자, “입을 옷이 업서?” 하며 측은한 눈길로 나를 바라본다. 이제 엄마 마음도 공감할 줄 알고 제법 컸구나. 그리고 다시 한 번 후유, 한 숨을 내쉰다. 도대체 이 옷장엔 무슨 옷들이 들어가 있는 거야? 옷들 사이로 뒤적뒤적 미련한 손길을 줘보지만, 그런다고 마음이 달라질 리 없다. 오늘은 이만하자. 포기다. 며칠 전 입었던 그 옷을 걸치고 거울에 비춰본다.


“엄마 예쁘다. 우리 엄마 예뻐.”

옆에서 딴 짓하고 있는 줄 알았던 유은이가 한마디 했다.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순간 양 볼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예쁘다니, 예쁘다니?


“정말?”

“응 예뻐. 원래도 예뻤는데, 오늘은 더 예쁘네?”


여자라면 예쁘다는 말은 빈말도 좋다거나, 엄마도 여자예요, 라는 티피컬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게는 조금 다른 의미가 있다. 같은 말이라도 남편에게 듣는 것과 유은이에게 듣는 것은 사뭇 차이가 있다. 말의 농도에서 느껴지는 아이만의 농밀함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에겐 어떤 말이든 특별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일단 유은이는 작은 머리를 한껏 치켜 올린 채, 반짝거리는 눈을 맞추며 이야기 해준다. 그리고 발음에 능숙하지 않은 입술과 혀에 있는 힘을 다 쓰는 모습을 보면 퍽 감격스럽다. 혹여 힘 조절이 잘 안 되어 큰 소리로 꽥꽥댈지라도 괜찮다. 게다가 이제 막 배운 말을 상황에 맞춰 찰떡같이 활용할 때면 인간의 창의성에 대한 경의로움마저 느껴진다.


유은이가 하는 대부분의 말은 내게서 나온 것이다. 물론 예쁘다는 말도 예외가 아니고, ‘원래 예쁜데 더 예쁘다’는 문장은 나의 주 사용 문장 중 하나다. 내 입을 통해 흘러간 말들이 유은이를 통해 다시 귀로 돌아온다. 귀한 예쁨을 얹어서. 그저 건네었을 뿐인 작은 씨앗을 잘 키워진 화분으로 돌려받을 줄은 몰랐다.


엄마가 제일 예쁘다는 유은이는 요리를 하거나, 청소를 할 때에도 어디선가 달려와 꼭 말해준다.

“엄마 예뻐. 찰칵찰칵.”

양쪽 엄지와 검지로 카메라 잡는 시늉을 하면서.


오늘도 한 마디의 전달을 위해 거뜬히 몸을 던져 이야기하는 유은이를 본다. 엄마와 눈 맞추고 이야기하기 위해 발끝부터 목까지 힘을 준 아이를 보면, 그 순간 모든 것이 진심이라고 믿어진다. 유은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연필로 한자씩 꾹꾹 눌러 쓴 원고지를 읽는 기분이다. 마음을 담아 쓴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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