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회관 공연
교회에 다닌다고 말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뉜다. 이미 교회에 익숙한 사람들은 반가워한다. 이제 같은 편이 된 것처럼 웃으며 말을 건넨다.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으니 삶이 더 나아질 거라고, 결국은 천국에 가게 될 거라고 덧붙인다. 대체로 따뜻하고 호의적이다. 반대로 교회에 거리감을 가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왜 하필 일요일이냐고 묻는다. 한 주를 버텨낸 뒤 겨우 쉬는 날인데, 왜 굳이 교회에 가느냐고 한다. 집에서 쉬거나 운동을 해도 될 텐데, 참 부지런하다는 말로 마무리한다. 직접적인 비판은 아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거리감이 담겨 있다. 나는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신앙의 확신보다는 아내의 권유가 컸고, 결정적인 계기는 코로나 이전에 우연히 보게 된 한 번의 공연이었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골목 안쪽에 자리 잡은 작은 교회다. 주차장은 넉넉하지 않고, 겉모습만 보면 여느 동네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만큼은 달랐다. 교회에서 주최한 공연은 부산문화회관 중강당에서 열렸고, 오케스트라 편성 프로그램도 있었다. 단순히 교회 안에서만 소비되는 연주가 아니라, 일반 관객을 초대한 공식적인 무대였다. 무대 위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와 그에 담긴 집중력을 보며 생각했다. 규모나 환경이 아니라, 태도가 사람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그날 공연을 보며 처음으로 이런 마음이 들었다. ‘나도 언젠가는 저 무대에 서보고 싶다.’ 막연한 동경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악기를 본격적으로 배운 적도 없었고, 무대 경험도 없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후 관악부 밴드에 참여하게 되었고, 생각보다 빠르게 무대에 설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에도 교회 내부 행사가 아니라 외부 공연장이었다. 일반 관객이 있고, 티켓이 있고, 평가의 시선이 존재하는 자리였다. 자연히 연습의 밀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매주 일요일마다 모여 같은 곡을 반복해서 맞췄다. 음이 어긋나는 순간을 그냥 넘기지 않았고, 리듬이 흐트러지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연습 과정은 쉽지 않았다. 각자의 생활이 있고, 체력의 한계도 분명했다. 하지만 매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여 같은 악보를 펼치는 일은 조금씩 사람을 바꾸어 놓았다. 잘하고 싶은 마음보다, 함께 무너지지 않으려는 마음이 더 커졌다. 공연이 가까워질수록 준비는 연주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남자들은 단체 턱시도를 맞췄고, 아내는 플루트 팀의 일원으로 무대 드레스를 준비했다. 음악이 단순한 취미를 넘어 삶의 일정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연습 시간에 맞춰 하루를 조정하고, 악보를 보기 위해 일상의 리듬을 바꾸게 되었다.
공연 당일, 무대 뒤편에서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검은 턱시도를 입고 색소폰을 든 채, 어두운 공간에서 순서를 기다렸다. 머릿속에는 악보와 연주 순서만 남아 있었다. 관객을 마주할 생각을 하면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그 떨림은 불안이기도 했고, 동시에 살아 있다는 감각이기도 했다. 조명이 켜지고 무대로 나가라는 신호가 떨어졌다. 악보를 보면대 위에 올려두고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첫 곡은 ‘사랑으로’. 독주 파트가 없는 곡이어서 비교적 담담하게 연주를 마칠 수 있었다. 숨을 고를 틈이 생겼다. 두 번째 곡 ‘주의 은혜라’는 달랐다. 피아노 반주가 시작되자 무대의 공기가 분명히 달라졌다. 각자 독주 파트가 있는 곡이었다. 며칠 전부터 긴장을 감추지 못하던 S집사님의 첫 소리가 무대를 채워 나갔다.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진심이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을. 연주는 끝났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완벽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미숙한 부분도 있었고, 스스로 아쉬운 순간도 남아 있다. 하지만 그날의 경험은 분명했다. 악기를 통해, 공동체를 통해, 나는 이전과는 다른 세계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이 무대가 특별했던 이유는 단지 큰 공연장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각자의 시간을 떼어내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같은 소리를 만들어 냈다는 점 때문이다. 누군가는 퇴근 후 연습실로 향했고, 누군가는 주말의 휴식을 포기했다. 그 선택들이 쌓여 하나의 무대가 되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공연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신념의 고백으로,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선택으로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만 내가 경험한 교회는, 적어도 내게는 삶의 반경을 조금 더 넓혀주는 공간이었다.
신앙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악기 연주가 그러하듯, 반복과 실패 속에서 조금씩 쌓인다. 무대 위에서 한 음을 책임지는 일은, 일상 속에서 자기 몫의 시간을 책임지는 일과 닮아 있다. 눈에 띄지 않아도, 누군가는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문화회관 무대에 섰던 그날 이후로 나는 삶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다. 잘 살아야 한다는 막연한 기준 대신, 성실하게 쌓아가는 시간의 가치를 생각하게 되었다. 신앙이든, 음악이든, 삶이든 결국 중요한 것은 방향보다 태도라는 사실을.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여전히 교회가 낯설고, 음악이 부담스럽고, 새로운 시도가 두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을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드는 길은 언제나 거창하지 않았다. 한 걸음 들어가 보고, 한 번 더 머물러 보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 태도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