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이었다.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판결의 주심을 맡았던 문형배 판사가 퇴직하며 낸 책 <<호의에 대하여>>를 읽었다. 그 책을 통해 나는 한 사람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다. 진주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며 수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건넨 김장하 선생님이었다.
아무런 인연도, 안면도 없는 학생에게 고등학교와 대학 등록금까지 선뜻 내어주었다는 이야기는 쉽게 믿기지 않았다. 글을 읽는 내내 그 마음의 크기를 가늠해 보려 했지만, 끝내 닿을 수 없는 어떤 영역처럼 느껴졌다. 다만 분명했던 것은, 세상에는 그렇게 조용히 베풀고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문형배 판사는 판사로 살아가는 동안 그 호의를 잊지 않으려 애썼다고 했다. 주말이면 고아원을 찾아 봉사를 하고, 자신이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는 삶을 선택했다. 호의가 한 사람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람에게 이어지는 흐름. 그 이야기를 읽으며 나 역시 그 물줄기에 아주 조금이라도 발을 담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지고 싶었다. 직원들에게도 가능한 한 배려하고, 작은 것이라도 챙겨주려고 했다. 그렇게 하면 그 마음이 전달되어, 함께 일하는 시간도 더 따뜻해질 거라 믿었다. 어쩌면 그 기대가 아주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지난 목요일의 일을 겪으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내가 건넨 호의는 그 순간으로 끝났어야 했다. 그 뒤에 어떤 반응이 따라올지,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질지까지 기대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한 호의가 아니었다. 사업체라는 공간 안에서는 더더욱 그 경계가 필요했다.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고, 그 마음속까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유독 마음이 가는 사람에게 더 많이 내어주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상대에게는 ‘이용할 수 있는 여지’로 보였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한순간에 흐트러졌다.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일까, 아니면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던 것일까. 답을 찾지 못한 채 혼란스러움이 남았다.
그날 저녁, 마음이 무거워 직원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한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새로 뽑을 접수 직원의 퇴근 시간을 6시 반으로 맞춰줄 수 없겠냐는 이야기였다. 저녁먹을 시간이 부족해서 편하게 먹고 싶다는게 이유였다. 보통 직장에서는 점심은 제공하지만 저녁까지 주는 곳은 드물다. 대학병원을 다니고 있는 아내조차 병원에서도 그런 식사는 제공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 혹시 배고플까 싶어 저녁을 챙겨주던 것이 내 나름의 호의였는데, 그 호의가 ‘부족한 것’으로 느껴졌다는 사실이 낯설게 다가왔다. 더 잘해주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그제야 또렷하게 알게 되었다.
호의는 참 묘하다. 건네는 사람의 마음 온도와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온도는 다르다. 어떤 이에게는 감사로 남고, 어떤 이에게는 당연함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당연함은 종종 더 큰 기대를 불러온다.
그날 이후로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호의에도 적정한 온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 차갑지도 않게, 그렇다고 지나치게 뜨겁지도 않게. 상대를 위한 마음이 나를 소모시키지 않도록, 관계가 어긋나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서 머무르는 것. 어쩌면 그것이 오래 지속될 수 있는 호의의 형태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려 한다. 내가 건넨 것은 그 순간으로 충분하다고. 그 이상은 기대하지 않고, 다만 그 마음이 어디론가 흘러가기를 조용히 바라는 정도로. 호의는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나 자신을 흔들지 않는 선에서 머물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