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잠이 없어졌다. 요즘은 거의 예외 없이 새벽 네 시쯤 한 번 눈을 뜬다. 특별한 꿈을 꾼 것도 아니고, 소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눈이 떠진다. 그 이후로는 잠이 쉽지 않다. 침대에서 뒤척이다가 유튜브를 켜보기도 하고, 다시 눈을 감아보기도 하지만 길어야 30분이다. 그마저도 얕은 잠이다. 다시 깬다. 아침까지 푹 자본 게 언제였는지 떠올려보면 쉽게 기억나지 않는다. 머리맡에 책을 두고 정 잠이 오지 않을 때는 몇 쪽을 넘겨보지만, 수면이 부족한 상태라 눈이 금세 피로해진다. 머리는 먹먹해지고, 눈은 모래알이 들어간 것처럼 까칠하다.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는 것도 아닌 애매한 시간만 흐른다. 이럴 바엔 그냥 일찍 일어나자는 생각이 든다. 더 누워 있어도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이미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샤워를 한다. 따뜻한 물이 어깨와 등을 타고 흐르지만 몸이 개운해지기보다는 무거운 상태가 유지된다.
오늘은 일곱 시에 집을 나섰다. 어제, 모임이 있어 소고기를 먹고, 마무리로 라면까지 한 그릇 비웠다. 요즘 운동이라고는 일주일에 두 번 하는 필라테스가 전부다. 어깨 부상 이후 헬스를 끊었다. 숨이 찰 정도로 땀 흘리며 운동한 기억은 작년 여름 이후로 없다. 먹는 양을 줄여 배가 나오지 않게 하려고 나름 신경 쓰고 있지만, 어제는 분명히 선을 넘었다. 샤워를 하며 거울을 보니 배가 어제보다 확실히 더 나와 보인다.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최소 1센티는 더 나온 것 같다. 오른쪽 눈두덩은 한 달 넘게 아침마다 부어 있다. 짠 음식을 먹은 날이면 더 두드러진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다. 손가락으로 꾹 눌러본다. 왼쪽과는 확연히 다르다. 양치를 하고 샤워를 마친다.
약국에서 불과 50미터 거리에 색소폰 연습실이 있다. 출근 전에 잠깐 들르기로 했다. 오늘은 곡 연습은 하지 않았다. 롱톤과 스케일 연습만 했다. 아침에 무언가를 연습하고 있다는 느낌이 좋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몸과 숨을 먼저 쓰고 있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큰 만족감을 준다. 새로 산 소프라노 색소폰은 여전히 어렵다. 작고 예민하다. 알토 색소폰이 편안한 마누라 같은 악기라면, 소프라노는 다루기 까다롭고 예민한 새침떼기 여자 같다. 조금만 신경을 덜 쓰면 바로 소리가 달라진다. 숨의 방향, 입술의 각도, 힘의 배분이 쉽지 않다. 하고 싶어서 구매했지만 순탄하지는 않았다. 셋업이 맞지 않아 저음 도♯ 음이 나지 않았고, 넥을 뽑는 것도 힘이 들어 악기사에 두 번이나 다녀왔다. 손을 다시 보고 조정을 거친 뒤에야 악기 문제는 사라졌다. 하지만 연습할 때는 여전히 알토로 할 때 보다 두배 이상 신경 쓰인다. 유튜브에서 본 어떤 색소폰 연주자는 소프라노를 알토와 완전히 다른 악기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같은 색소폰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접근 방식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고음은 훨씬 까다롭고, 비브라토와 밴딩은 난이도가 눈에 띄게 높아진다. 예민한 악기를 다루다 보니 입술의 모양과 힘의 강약을 다시 처음부터 점검하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 공부했을 때가 생각난다. 기본 정석만 보다가 실력 정석으로 넘어간 느낌이다. 그동안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씩 흔들린다. 숨을 내쉬는 각도, 턱의 위치, 악기를 세우는 각도까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잘 안될수록 연습량보다 집중력이 더 필요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마치, 큰 산을 정복하기 위해 다시 평지로 내려온 사람 같다. 동네 뒷동산에 잠시 갔다가 지리산을 타려고 준비하는 기분이랄까. 옷을 다시 고쳐 입고, 신발 끈을 조이고, 처음부터 걸음을 맞춘다. 정상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 멀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산을 오를 때마다 느끼는 게 있다. 산 전체를 한 번에 보려고 하면 금방 지친다. 대신 발밑만 보고 한 걸음씩 옮기면 생각보다 오래 걷게 된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에는 저기까지. 그렇게 구간을 나누다 보면 어느새 올라가 있듯이.
수면은 부족하고, 몸은 예전 같지 않고, 연습은 생각보다 더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목표가 분명해질수록 욕구는 더 선명해진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은 너무 많이 들어서 진부하게 느껴지지만, 막상 실감할 때는 늘 이런 순간이다. 새벽 네 시, 잠에서 깨어 멍한 상태로 하루를 시작하고, 몸의 변화를 체감하고, 연습실에서 같은 음을 반복하는 시간들. 그 모든 것이 한 걸음이다. 오늘도 정상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걷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