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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Feb 02. 2022

종이 위의 산책

쓰는 일은 산책이다


걷는다. 오늘은 집 근처의 작은 숲길을 걷는다. 자주 걷는 곳이다. 가끔은 동네 공원길을 걷기도 한다. 운동 삼아 뛰듯이 걷는 사람도 보이고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할머니도 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여자도 지나간다. 나는 주로 혼자 천천히 걷는다.   

   

봄날 숲길을 걸으면 사랑에 빠진 사람의 표정을 짓게 된다. 이른 봄 도롱도롱 피기 시작하는 노란 산수유 꽃을 보면 저절로 웃게 된다. 숲길에 하얀 벚꽃잎이 하랑하랑 날리면 완연한 봄이 왔다고 감탄하는 표정이 된다. 연두에서 초록으로 넘어가는 이파리들은 하염없이 바라보게 된다. 하루하루가 다르니 바라보는 마음도 하루하루 더 설렌다. 사랑을 할 때처럼 웃고 감탄하고 설레게 된다.      


산책하는 것은 과학자의 모습을 갖게 한다. 처음 보는 나무를 보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이름을 찾아보게 된다. 가지에 세 방향으로 날개가 달린 화살나무의 이름을 그렇게 알게 되었다. 까치가 꼭 깍깍 울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까치는 낯선 사람이 둥지 가까이 오면 목울대를 낮게 긁으면서 전혀 까치가 아닌듯한 소리를 낸다. 이방인이 멀어지면 그때야 깍깍 운다. 그러면 멀리 있는 다른 나무에서 같은 소리로 답한다. 여름날 찌르르 울어대는 매미를 잡아 관찰하는 아이들의 표정도 호기심에 가득 차 있고 처음 보는 꽃을 발견하고 서로 이름을 궁금해하는 중년 여성들의 표정에도 신기함이 보인다.      


또 철학자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가을에는 키도 잎의 모양도 비슷해 보이는 밤나무와 상수리나무들이 다툼 없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직장 동료와 관계가 서먹해져서 괴로웠던 마음을 정리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가 아닐까 고민스러웠던 날도 산책을 나섰다. 그날은 나보다 몇 배나 키가 큰 밤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둥치가 제법 굵어 나이가 수십 살은 되어 보였다. 올해도 풍성하게 밤이 달려 있었다. 불현듯 지난봄 그 나무의 가지에서 본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이파리가 생각났다. 저렇게 나이가 많은 나무도 해마다 잎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일을 반복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주저함을 물리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비가 오는 날의 산책은 더욱 좋다. 오늘처럼 이슬비가 내리는 날은 흙냄새와 비 냄새가 숲의 향기를 안고 퍼진다. 사람들이 없는 틈에 마스크를 살짝 내려본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축축한 공기가 몸 곳곳의 세포를 깨운다. 우산을 쓰고 자박자박 걷다 보면 젖은 땅의 기운이 신발을 뚫고 발바닥을 지나 내 몸 전체로 퍼지는 느낌이 든다. 마치 내가 나무가 되어 땅속 깊은 곳의 물기를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몸이 비 맞는 나무처럼 팽팽해진다. 바람 불고 추운 날에도 걷는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숲의 깊은 곳 가장 키가 큰 나무부터 길가에 바짝 자리 잡은 관목들까지 모두 바람의 박자에 맞춰 몸을 흔들며 노래를 한다. 나무들의 멋진 합창을 공짜로 들을 수 있는 귀 호강을 하게 되는 날이다. 눈 오는 날의 산책은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 속 삽화에 들어간 것처럼 마음이 천진해진다. 이 작은 숲은 동네에서 가까이 있다. 눈이 많이 오는 날에는 아이들이 몰려와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든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저녁이면 크고 작은 눈사람들이 낮에 아이들과 놀았던 재미있던 일들을 도란도란 얘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내가 사는 곳은 신도시다. 이곳은 아파트 단지들이 공원길로 연결되어 있다. 오랜 시간 사람이나 동물들이 지나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길이 아니라 도시를 건설하면서 계획적으로 사람이 만든 반듯한 길이다. 그래도 길가에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있어 산책할 기분이 난다. 몇 해 전 맑은 겨울날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반짝거리며 날아다니는 무엇을 발견했다. 고개를 들어 자세히 보니 박주가리 씨앗이었다. 참깨 한 알 정도의 작은 씨앗이 자기 몸의 몇 배가 되는 은실로 된 수십 가닥의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올가을 우연히 발견한 박주가리 덩굴에 연보라색 꽃이 핀 것을 보았다. 꽃은 처음 이번에 보았다. 열매와는 달리 소박하게 생겼다. 꽃 하나의 크기도 새끼손가락 끝의 작은 손톱만 해서 별로 눈에 뜨이지도 않건만 열매는 콩깍지보다 훨씬 크고 두툼했다. 솜털 보송한 작은 꽃이 큰 열매로 자라고 열매는 바람 부는 겨울 어느 날 제 몸을 벌려 씨앗들을 멀리 날리는 과정을 상상해보면서 박주가리 씨앗을 주인공으로 짧은 영화를 만들거나 이야기를 만드는 일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책은 이렇게 상상의 세계 속도 걷게 해 준다.      


공원길 산책할 때는 근처 어린이집에 나온 아가들의 소풍도 볼 수 있다. 기저귀를 차고 있는 둥그런 엉덩이의 두세 살 어린 아가는 선생님의 손을 잡고 네다섯 살 손위 아가들은 짝꿍의 손을 잡고 콩콩 뛰고 까르륵 웃고 재잘재잘 떠드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일 년 넘게 아이들의 모습이 공원에서 사라졌었다. 비어있는 공원 놀이터를 보면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했다. 대유행이 조금 가라앉은 지난 초가을 다시 놀이터를 찾은 아이들을 보았다. 빨간색의 조끼를 단체로 입은 아이들이 낙엽을 줍고 벌레를 찾고 열매를 들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았다. 아이들은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웃음소리는 마스크를 뚫고 나와 가을을 반짝거리게 해 주었다. 그날은 공원 근처 카페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커피를 마셨다. 진한 쓴맛의 커피가 달았다.      


밤 산책도 좋아한다. 너무 덥거나 너무 춥지 않은 봄가을, 달이 둥실 떠오른 밤의 산책은 나도 달처럼 환해져서 둥실 떠오르는 기분이 든다. 적막하고 평화로운 우주의 어느 곳으로 날아가 나를 마주 보는 무엇인가를 만날 것 같다. 이런 밤이면 집으로 돌아와서 글을 쓴다. 밤과 달빛에 관해서 쓴다. 산책 중에서 만난 나무와 꽃에 관해서 쓴다. 나무와 나무를 오가며 숲의 소식을 전하는 새들에 관해서도 쓴다. 글로 하는 산책은 발자국으로 이어진 산책처럼 어느 날은 짧고 어느 날은 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무와 꽃과 새들에 기대 내 이야기를 쓴다. 꽃처럼 환하게 빛나는 설렘을 쓰는 날이 있다. 혼자 우뚝 서 있는 나무처럼 고독한 날은 쓸쓸함을 쓴다. 걱정과 시름으로 아주 슬펐던 날은 눈물을 흘리는 대신 바람의 소리를 빌려 글로 운다. 그러다가 속상함이 가라앉고 누군가의 위로로 기운을 다시 차리게 되면 한때 나무였던 종이 위를 단어들이 새처럼 날아다닌다. 이십여 년을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큰 상처를 받았었다. 몸과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지면서 사는 일이 아주 고단하고 힘이 들었다. 그때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무서웠고 거리로 나가는 것이 두려웠다. 병을 얻어 몸은 비록 걷지 못했지만 마음은 글 산책을 계속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고 나니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산책'이라는 두 글자를 들여다보면 길을 닮았다. 시옷은 두 갈래로 나누어진 길이고 니은은 오른쪽으로 휘어진 길이다. ‘책’이라는 글자에 있는 모음 ‘애’는 신도시의 곧게 만든 공원길을 떠오르게 한다. 나머지 자음과 모음도 다 길고 짧은 길들의 모양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든 글자는 다 길을 닮았다. 오솔길 같은 글자들이 모여 글을 이루게 되면 좁은 길에서 넓은 길로 걸어 나갈 수 있다. 수필은 문장을 심어 문단을 키운 이야기의 숲이다. 누군가의 수필을 읽는 것은 그 사람이 만든 생각의 숲길을 같이 걸어주는 것이다. 숲길을 걷는 것이 몸의 산책이라면 쓰는 것은 마음이 종이 위를 산책하는 일이다, 오늘도 산책을 마치고 글을 쓴다. 누군가와 마음 산책을 나누고 싶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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