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밥, 밥
80의 밥, 50의 밥, 20의 밥
무슨 반찬으로 밥을 먹을까 주방을 둘러보니 김이 한 봉지 눈에 뜨인다. 전 국민이 먹어봤을 바로 그 에헴 양반김이다. 마침 해놓은 밥도 있고 채 썰어 물기를 꼭 짜 참기름과 통깨 뿌려 무친 오이지도 있으니 여름 점심밥으로 이만하면 뱃골에 점이 찍히지 싶다.
김가루 떨어지는 게 싫어 김이 들어있는 비닐봉지의 위아래를 자르고 가운데도 잘라 펼쳤다. 김을 자르려고 보니 기름 쩐내가 훅 코로 들어온다. 여러 개 있으니 너 몇 개 가져가 먹어라 해서 엄마 집에서 가져온 김이다. 잊고 두세 달 묵혀두었더니 김에 발라진 기름이 상했나 보다. 설 때 들어온 선물이라 하셨으니 반년은 족히 지났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든 음식은 쉬이 상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저 김은 그 시간조차 지났나 보다. 한두 개 먹어보니 도저히 못 먹겠어서 버리려고 옆에 밀어 두고 짭짤한 오이지무침이랑 밥을 먹었다.
어릴 때는 신문지를 넓게 깔고 김을 놓고 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살살 뿌려 김을 재서 구워 먹었다. 그때는 시장이나 마트에서 구워진 김을 팔지 않았다. 100장짜리 한 톳 단위로 생김을 팔았다. 그걸 사다가 집에서 한 장 한 장 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뿌려 구워 먹었다. 집집마다 그렇게 구워 먹었다. 엄마는 종종 내게 김 굽는 일을 시키셨다. 한 장 한 장 김을 굽는 일은 지루하지만 막상 시작하면 은근 초집중이 되는 일이었다. 후끈한 연탄불의 열기에 석쇠에 얹은 검은색 김이 투명한 녹색으로 변하면서 살짝 쪼그라든다. 그 순간 들기름이나 참기름의 고소한 냄새도 훅 퍼진다. 그러면 타지 않게 얼른 석쇠를 뒤집어주면서 네 귀퉁이도 구워지도록 골고루 열기를 가해준다. 그렇게 구운 김을 잘라 밥상에 내면 고소함과 바삭함에 너나 할 것 없이 젓가락들이 바빴다. 우린 일곱 대식구였으니 한 번에 두서첩은 구웠던 것 같다.
그때는 몇 장 안 남으면 서로 먹으려고 동기간에 눈치 주고 했던 김인데 요즘은 마트나 시장에서 손쉽게 구해 먹을 수 있다. 단체급식을 하는 곳에서도 김은 흔히 나오는 반찬이다. 부피도 작지 않고 상자에 반듯하게 담기니 선물로도 많이 주고받는다. 그러다 보니 먹고 싶어서 산 것이 아닌 선물로 받은 경우 나처럼 오래 묵히는 경우가 생긴다. 아마 엄마네 집에도 아직 뜯지도 않은 김이 몇 봉 있을 것이다.
엄마는 혼자 사신지 십 년이 넘었다. 그간 자식들은 엄마를 뵈러 갈 때마다 이것저것 식재료를 사다 나르거나 반찬을 해서 드렸다. 작은 언니는 손이 크고 정이 많아 여러 날 두고 드시라고 큰 통에 많이 해왔다. 가끔 엄마 집 냉장고를 뒤져보면 언니가 해온 오래된 반찬들이 먹을 수 없는 지경이 돼서 나온다. 연세가 드시니 넣어두고 깜빡하시나 보다 생각하고 잊지 말고 잘 챙겨 드시라 했다. 그러나 막상 내가 혼자 살아보니 한 사람이 한 두 끼 먹어서 소비되는 음식의 양은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장정도 아닌 중년의 내가 혼자 먹는 양은 한 끼에 빕 한 공기 반찬 한 접시 정도이다. 그러니 만든 음식도 남고 만들기 위해 필요한 식재료도 남게 된다. 나도 그동안 식구들을 해먹이던 계량으로 음식을 만들어 결국 두세 끼를 먹게 된다. 그러고도 남는 것은 작은 반찬통에 담겨 냉장고로 가게 되고 며칠만 지나도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다 보니 냉장실과 냉동실이 남은 음식들로 꽉 차게 된다.
일제강점기와 육이오 전쟁을 겪으신 팔순 엄마는 외식은 돈 드는 일이라고 어려워하신다. 몸도 마디마디가 불편하니 혼자 나가 음식을 사 먹는 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지팡이나 보행보조기를 이용하는 할머니가 혼자 식당에서 밥을 드시는 것을 나도 본 적이 없다. 배달음식을 시켜 드시는 것 또한 난감해하신다. 너무 짜고 맵고 달고 기름지다 하신다. 오래 음식을 만드셨으니 재료에 비해 비싸다 생각하신다. 그러니 못 시킨다. 그리고 냉장고에 가득한 식재료는 조금 상해도 쉽게 버리지를 못한다. 먹을 수 있는 부분은 먹어야지 생각하고 다시 냉장고에 넣어두신다. 그러니 냉장고는 마지막을 치닫는 테트리스 게임의 벽돌처럼 틈이 여기저기 뚫린 채로 꽉 차게 된다.
이십 대인 딸은 자주 배달 어플로 완성된 한 끼 음식을 주문해서 먹는다. 가끔 음식을 해먹기도 하는데 집에 다양한 식재료가 있지 않다 보니 음식을 만들 때마다 구입을 하는 일을 곤란해한다. 장을 보는 것도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이라서 아침에 일찍 출근하고 저녁에 늦게 퇴근하다 보면 결국 또 배달음식을 시켜 먹게 된다고 한다. 큰맘 먹고 된장찌개라도 끓이려면 감자 호박 두부 등등을 사들여야 하고 남은 재료들은 냉장고로 들어가 오래 있다가 음식이 되어보지 못하고 버려지게 된다. 젊은 세대일수록 유통기한을 철저히 따져 잘 버린다. 요즘은 재료를 필요한 만큼씩만 넣은 음식 꾸러미(밀 키트) 상품이 많이 나왔다. 딸은 종종 이런 것도 이용하는 것 같다.
오십 대인 나는 식재료를 근처 상점에서 사다가 직접 만들어 먹는다. 재료가 여러 가지가 쓰이는 음식은 잘 만들지 않는다. 재료가 남으면 그 재료를 활용하여 다시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데, 꼭 새로운 재료가 필요하고 다시 장을 봐야 해서 번거롭다. 그러니 두세 가지 재료로 해 먹을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먹는다. 음식 배달은 잘 시키지 않는다. 그동안 나 스스로 길들인 내 입맛과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 내가 먹을 수 있는 것보다 양도 많고 포장에 쓰인 플라스틱 쓰레기가 많이 나오는 것도 부담스럽다. 밖의 음식이 먹고 싶으면 나가서 먹는다. 혼자서도 곧잘 나가 먹는다. 포장을 해와서 먹을 때에는 내가 먹지 않는 반찬은 빼고 받아온다. 나가기도 귀찮고 피곤한 날은 밥에 물 말아서 김치 한 가지 놓고 먹는다. 엄마가 준 김을 바로 먹지 않은 것은 한 봉을 뜯으면 그것을 다 먹을 때까지 계속 먹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반찬들과 김을 같이 먹다 보면 결국 눅눅해진 김을 버리게 된다. 그러니 다음에 먹어야지 미루다가 기름이 상해 아예 못 먹게 된 것이다.
엄마의 냉장고의 냉동실에는 반건조 생선과 말린 나물들이 꽉 차있고 냉장실에는 된장부터 시어 꼬부라진 김치까지 칸칸이 차 있다. 딸의 냉장고에는 아마도 먹다 남은 배달음식과 시들어가는 양파 쪼가리와 우유와 달걀 정도가 있을 것 같다. 딱딱해져 가는 식빵도 냉장실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겠다. 나의 냉장고 속사정은 엄마와 딸의 중간쯤이다. 내가 나이가 더 들게 되면 나는 어떤 식생활을 하게 될까? 엄마처럼 냉장고를 비워야 할 때 못 비우는 것도 싫지만 딸처럼 손 빠르게 터치 몇 번으로 시켜먹고 일회용품 주르륵 버리는 것도 자신 없다. 식권 파는 노인정이나 한 곳 뚫어서 뽕실하게 빠마한 머리로 빨간 루주 바르고 밥 먹으러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