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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Feb 03. 2022

이사

재활용품 모아 두는 곳 한편에 책상이 하나 버려져 있다. 결이 살아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책상이다. 서랍 하나는 주저앉아 있었고 책상 위에는 오래된 낙서가 물들어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 스티커도 붙어있다. 작은 3단 책꽂이도 버려져 있고 냉장고도 하나 있고 장롱도 있다. 냉장고는 우리 집에 있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10년 넘게 사용하던 것을 이사하면서 버린듯하다. 장롱은 아주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결혼할 때 신경 써서 장만했던 것 같다. 농 뒤편 합판에 붙은 종이에 써진 가구회사 이름을 보니 익숙하다. 오래 사람과 함께 집 안에서 같이 살던 살림살이들이 집에서 쫓겨나 대처 땅바닥에 바람을 맞고 있다. 하지만 그 물건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쓸쓸하지는 않다. 작은 평수의 복도식 아파트에는 신혼부부나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있는 집들이 많다. 그들은 집을 늘려 이사를 갈 때 쓰던 살림을 버리고 간다. 특히 분양받은 아파트로 새로 입주하는 경우 쓰던 살림을 거의 다 버리고 새로 장만해서 간다. 그러니 그들의 이사의 흔적을 볼 때는 내가 새집으로 이사하던 일이 떠오르면서 괜히 즐겁다.      


아주 가끔은 정말 오래된 살림들이 나올 때가 있다. 얼마 전에는 초록 이파리와 붉은 모란꽃이 그려진 하얀 도자기 요강이 버려진 것을 본 적이 있다. 작년 어느 날에는 이 요강처럼 오래된 살림이 아주 많이 나왔었다. 배불뚝이 작은 텔레비전과 허리가 찌그러진 누런 양은 찜통, 베란다 볕 잘 드는 곳을 차지하고 오래 앉아있었을 항아리 몇 개, 누군가의 머릿기름이 베어 반질반질한 대나무 조각으로 엮어 만든 목침이 나왔다. 이불도 있었다. 무거워 보이는 솜이불의 붉고 노란 비단 천에 나비가 훨훨 날고 있다. 이불은 홑청이 누렇게 바래진 채로 100리터짜리 쓰레기 종량제 봉투 속에 욱여넣어져 있었다. 그 이불 옆에 삼사십 년 전에나 쓰던 스테인리스 국그릇과 공기가 몇 개 쌓여 있었다. 몇 달 전 옆 동 출입구에 사설 구급차 같은 차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사설 구급차와 달리 차에 아무런 글씨가 없었다. 그저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잠시 후 환자 이송용 바퀴 침대가 아파트 건물에서 나와 누군가를 차에 태우고 떠났다. 머리까지 하얀 포가 덮여있었다. 평수가 작으니 노인들도 많이 산다. 노인들은 자기들처럼 오래된 살림을 품고 산다. 잘 버리지 못하다가 자신이 떠난 후 한꺼번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버려진다. 마지막 이사를 끝내고 버려진 묵은 짐을 보는 것은 쓸쓸하다.      


며칠 전에 눈이 왔다. 많은 눈이 내려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새로 이사한 집에 새로 들인 가구처럼 세상이 깨끗하게 반짝거렸다. 날이 따뜻해지자 눈이 녹기 시작했다. 해가 잘 드는 곳은 바로 녹아 사라졌다. 물이 되어 어디론가 이사를 떠났다. 건물 모퉁이 그늘이 진 곳은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눈과 먼지와 흙이 엉겨서 얼룩덜룩한 채 쌓여 있었다. 그늘 속에서 조금씩 녹다가 얼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온몸 관절에 구축이 생겨 제힘으로는 팔다리를 펴지도 웅크리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눈이 녹아서 사라지지 못하고 진물을 흘리며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더 흐르면 결국은 사라질 것이다. 따뜻한 날이 오면 깨끗하게 잘 사라지길, 욕창 같은 눈 얼룩을 보며 바라본다. 높은 나뭇가지에 까치가 집을 짓고 있다. 까치는 매년 새로 집을 짓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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